김형주는 우리나라 제2의 항구 도시 인천에서 태어나 줄곧 도시에서 살았다. 그가 인천과 서울을 오가며 무심하게 지나치던 자연에 처음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하면서이다. 인물이나 사물보다는 공간 표현에 흥미가 있던 터 산수화 전통을 알고 나서 그림의 화제로서 자연을 보기 시작했다. 2010년대 초까지 신세대의 감성을 반영하듯 부드러운 파스텔톤의 색과 세밀한 붓질로 광활한 강산과 폭포 등 자연의 모습을 조형화한 이상적 산수화를 그렸다. 그 스스로 관념 산수를 그린 시절이라고 회고한 바처럼, 자연을 현실의 장소성이 탈각된, 이상적이고 관념적 공간으로 생각했다. 그가 이전과 달리 실재하는 환경으로 자연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 계기는 2016년 파주 근처의 작업실로 이사하면서이다.
경기도 북부의 파주는 DMZ에 인접해 있어 비교적 자연 친화적 환경을 유지하고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곳의 거주자가 되어 작가가 마주친 자연환경은 ‘스스로 이뤄지거나 존재하는 것’이란 자연의 본질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산속과 언덕에 자리 잡은 많은 음식점과 숙박업소와 대형 창고, 선주민의 낡은 집과 외지인의 전원주택과 논밭이 뒤엉킨 풍경은 혼돈 그 자체였고, 무분별한 난개발로 인한 자연환경의 훼손은 상상 이상이었던 것 같다. 그런 현실을 목격한 후 작가는 순수한 자연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 주변 환경을 꼼꼼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알고 나서 주변을 둘러보니 당연시 여겼던 많은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인간이 자신의 이윤과 편리함을 추구하기 위해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멀쩡하게 서 있던 산이 사라지고, 여름이면 잡초와 모기와의 전쟁이 일상이 되고, 가을 추수 후 짚단을 싸매 새들에게 이삭조차 허용하지 않는 야박한 세상이 바로 가까이에 있었다. 세상을 바꿀 힘은 없지만, 작가는 그런 안타까운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서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했다.
2019년의 첫 개인전에서 발표한 < 가벼운 풍경 > 연작은 그의 주변에서 어느 날 사라져 버린 이름 모르는 산의 이야기에서 착안했다. 우리 말 중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산이 어디 가겠어’라는 말이 있다. 자연의 변화와 영원을 뜻하는 대조적인 말이다. 전 국토가 개발로 몸살을 앓는 우리나라에서는 어쩌면 전자가 더 현실에 가까울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산은 그 모습 그대로 늘 그 자리에 있으리라고 상상한다. 그런데 눈앞에 보이던 산이 모래로 팔려나가며 어느 사이 사라지다니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작가는 자본의 논리가 산처럼 움직일 수 없다고 생각한 자연조차 쉽게 변화시킬 수 있음에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 가벼운 풍경 >이란 은유적 제목 아래 겹겹이 펼쳐지는 강산을 마치 떠 있는 듯 가볍게 그림으로써, 언제라도 사라질 운명에 처한 자연 환경의 위기를 전하고자 했다.
2021년 이후 김형주가 주목한 모티브는 바로 잡초다. 잡초는 이름 없거나 인간의 삶에 어떤 효용성도 없다고 여기는 식물을 총칭한다. 잡초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유독 잘 자라고 뽑아도 다시 자라는 질긴 생명력이 있다. 특히 여름의 정원이나 밭에 자라는 잡초는 전경을 해치거나 먹거리의 영양분을 빼앗는 심각한 골칫거리로 여겨진다. 일상에서 널리 사용되는 간단한 해결책은 제초제다. 제초제를 뿌린 잡초는 누렇게 시든 상태로 성장이 멈춰서 마치 좀비 같은 식물이 된다. 생명이 멈춘 노란색 식물을 가까이 들여다보듯이 그린 < 제초제 > 연작(2021), < 노란 식물 > 연작(2022), 그리고 《흔들림없는 편안함》 전시의 노란색 풍경은 잔디밭에 자유롭게 자란 < 유예 >와 < 리스트 >(2021) 연작의 잡초의 모습과 대비된다. 식물에 가해지는 인간의 폭력적 행위에 대한 소극적인 대응 방편으로서, 그는 잡초가 자유롭게 자랄 수 있도록 허용받은 공간의 안과 밖의 경계를 < 유예 >와 < 리스트 > 연작에 담았다. 그러나 살아있든 죽었든 그가 그린 잡초는 노란색과 녹색으로 색만 다를 뿐 섬세한 터치로 그려 서정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어쩔 수 없다》(2022)는 검정 비닐의 다양한 용도를 소재로 다룬다. 이 전시의 출품작은 바탕에 칠한 검은 먹색이 검정 비닐의 띠 형태와 일치하며 강렬한 시각적 효과를 띠는데, 특히 일정한 간격으로 밭고랑을 리듬감 있게 그린 < 내 땅 >에서 그런 효과가 두드러진다. 검정 봉지의 쓰임을 장 본 것을 담는 정도로 알고 있던 작가는 경작 과정에서 농작물의 생장을 방해하는 잡초를 억제하기 위해 밭고랑을 검은 비닐로 덮은 모습을 보았다. 심지어 산에서 내려와 죽은 고라니의 사체를 수거할 때도 검정 비닐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고라니 >, 2022). 작가는 검정 비닐이 자연환경을 오염시킬 것을 잘 알기에 그것의 남용이 정말 어쩔 수 없는 것인지를 역설적으로 되묻는다.
2023년의 < 마시멜로 > 연작은 가을 추수 후 ‘곤포사일리지’ 뭉치가 있는 주변의 논 풍경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곤포사일리지는 가축의 여물로 쓰기 위해 볏짚을 원형의 흰색 비닐로 싸서 보관하는 것을 일컫는데, 그 모양과 색이 마치 마시멜로 같다고 해서 논 위의 마시멜로로 불리기도 한다. 이 연작은 이윤 추구 과정에서 발생한 생태계의 선순환 시스템의 파괴 문제라는 주제 의식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위에서 본 흰 사각 형태의 곤포사일리지의 다양한 조형적 구성에 치중해 내용이 형식에 묻힌 경향이 있다.
김형주는 동양화와 서양화의 방법을 접목한 독특한 방식으로 그림을 그린다. 먼저 캔버스 위에 한지를 붙이고 바탕을 먹으로 칠한다. 동양화는 선을 위주로 형상을 그리는 방법이 일반적이지만, 그는 먹 위에 아크릴 물감으로 꼼꼼하게 색을 칠해 형태를 만든다. 예를 들어 < 시민의 숲 1 >(2024)의 나무와 피어오르는 연기의 형태는 반복해서 꼼꼼히 칠한 색과 색을 칠하지 않은 부분에서 바탕의 먹색이 드러나며 생긴 검은 윤곽선에 의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바탕의 먹색은 아크릴로 칠한 사이사이로 희미하게 배어나서 균질하고 통일감 있는 화면을 만든다. 특히 《흔들림없는 편안함》의 출품작은 전면구도를 사용하고, 이전 작품에 비해 형상을 더욱 세밀한 터치로 꼼꼼하게 칠했다. 그래서인지 엠보싱처럼 형상이 볼록하게 올라온 듯 보이고 독특한 질감과 장식성이 강하게 느껴진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 빈틈없이 만들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강박적 태도에서 좀 자유로울 필요가 있어 보인다.
작품의 내용과 관련해 덧붙이자면, 지금까지 김형주는 인간의 입장에서 자연환경의 문제를 반성하고 성찰해 왔다. 그런데, 역으로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의 위치에서 인간과 자연의 문제를 다시 보는 상상은 불가능한 것인가? 만일 잡초가 되어 식물적 상상력을 발휘해 본다면 자연환경의 문제를 전혀 다르게 접근할 수 있지 않을지라는 엉뚱한 발상의 전환을 제안해 본다.
김형주는 묵묵히 노력하는 성실한 작가이다. 그가 재능은 없고 노력만 한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작가는 재능 외에 열망, 끈기, 꾸준한 수련, 자아 성찰, 미술계의 인정 등 내적, 외적 요소가 적절하게 합을 이뤄야 계속할 수 있다. 청년 작가의 문턱을 갓 넘어선 그는 미술계의 통과의례인 개인전을 여러 차례 치르며 작가로서 자질을 증명해 보였다. 전업 작가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창작의 고통과 경제적 불안감에 둔감해져야 하는데, 그는 이제 그런 상황을 버텨낼 내성이 충분히 생긴 듯하다. 김형주는 시류를 따라잡거나 인정받으려고 조급해하지 않고, 자신의 속도에 맞춰 차분하고 성실하게 작업한다. 장거리 마라톤과 같은 작가의 세계에서 이런 태도는 그의 최대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나는 그래서 김형주 작가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내다본다. (김현주 / 미술사학자, 전 추계예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