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Beyond Jeju

이창희
비움, 그리고 채움 그리고 이음

2024.12.06.-12.16.
주관/ 주최 아트노이드178
  
 
본연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며 존재하는 것들은 우리의 시선을 끈다. 자연의 계획대로, 자연의 기교로 만들어진 것들은 경탄을 불러온다. 인위적인 어떠한 힘의 더함도 없이, 저절로 생겨나 그렇게 존재하는 것들을 우리는 자연이라 부른다. 자연은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무심하게 그렇게 존재하며, 모두에게 평등하다. 레이첼 카슨이 말했듯이 “자연은 우리를 필요로 하지도 않고, 우리를 특별히 보살피지도 않지만,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환영해준다.” 무심하게 모든 것을 품어주는 자연과 마주할 때, 우리는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세속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난 평온한 마음을, 억압된 감정으로부터 해방되고 부조리한 현실을 관조할 수 있는 여유를 되찾는다. 자연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이 ‘아무데도 마음이 머물지 않는 무심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자연을 사랑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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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돌, 그리고 담

이창희 작가는 지난 10여 년간 자연 그 본래의 본성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제주의 풍경을 그려왔다. 그가 그리고자 하는 풍경은 단순히 장소를 재현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삶의 이야기를 제대로 마주함으로써 시작된다. 작가는 오랜 세월의 변화와 거친 환경 속에서 살아남은 자연이 지나온 시간의 궤적들을 찾고, 그 오래된 이야기에 귀기울인다. 작가는 자연의 온전한 의미를 작품 속에 담고자 한다.

수많은 제주의 절경들에 매료되어 쉼없이 그려온 작가의 눈을 사로잡은 것이 있다. 검은 돌로 쌓아 올려진 제주 돌담이다. 수평면을 따라 대지 위에 길게 끝없이 이어지는 제주 돌담은 검은 용이 1만 리에 걸쳐 있는 모습과 흡사하다 하여 흑룡만리라고도 불린다. 그것은 인간의 손이 닿았지만, 자연이 만든 것과 닮아 있다. 마치 자연의 기교를 절묘하게 흉내낸 것처럼 말이다. 제주에는 흙보다 돌이 많다. 거칠고 척박한 제주에서 돌은 천덕꾸러기가 아니라 고마운 존재다. 거센 바람을 막아 삶의 터전을 지켜주는 것이 돌담이기 때문이다. 언제 보아도 질리지 않는 나지막한 돌담은 자연에 어떤 해도 가하지 않는 자연의 경계선이다. 그것은 제주 사람들의 삶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생활 속에 녹아들어 있다. 소유의 한계를 결정하는 경계선이어야 마땅하지만, 그것은 자연과 인간을 잇는 공존의 산물이다.

구멍이 숭숭 뚫린 거친 돌로 툭툭 쌓아 올린 투박하면서도 정감어린 돌담은 소박하기 그지없지만, 아름다운 제주의 다채로운 풍경과 어우러진다. 제주 돌담은 소박하면서도 강인하고, 고요하면서도 묵직하며, 모던하면서도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이창희 작가는 이 아름다움의 근본에 존재하는 ‘돌’의 의미에 대해 탐구해 왔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만물 속에서 돌은 묵묵하게 자신이 놓인 자리에서 세월의 풍파를 견디어 낸다. 작가는 이를 ‘근본을 잃지 않는 묵직함’으로 설명한다. 제주의 검은 돌은 독특한 형태나 다채로운 색으로 시선을 끌지 않는다. 거친 풍파 속에서 거칠게 깎여지고 마모된 울퉁불퉁한 표면은 현무암이 갖고 있는 꾸밈없는 담담함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작가는 그 돌에서 돌의 근원적 형태의 본질, 자연의 생명력을 발견했다.

이방인의 시선으로 관조하듯 제주의 절경들을 화폭에 담아 내던 작가는 제주의 돌담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제주와 자신이 서로 스며드는 느낌을 받았다. 서로의 색을 조금씩 나누며 닮아가는 것, 그렇게 조화를 이루어가는 어우러짐이란 본디 이질적인 것이 함께 상생하며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작가는 돌담을 타고 오르며 자라나는 담쟁이 넝쿨들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조용히 어우러지듯, 자신이 제주의 삶에 어떻게 스며들어 갔는지를 떠올리곤 한다. 먼 곳의 풍경들을 그리기 위해 자연과 마주하고, 대상으로서 바라보던 작가의 시선은 이렇게 점차 가까운 이웃들의 삶, 그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 있는 자연과 어울려 살아가는 지혜로, 그 지혜를 바라보는 자신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작가의 내면 어딘가에 ‘조용히 자신의 본성을 향해 있는’ 시선이 자연의 근본적 본성을 깊게 간직한 돌들과 마주한다. 작가의 시선은 이렇게 외부로부터 내부로, 그리고 내부로부터 외부로 이어진다.

내부이면서 외부인 경계

이창희 작가는 이번 전시 에서 제주에서 제주 너머, 내부와 외부를 오가는 그 시선의 흐름을 구체화한다. 그는 유리창 너머의 제주 돌담을 그리기 시작했다. 작가는 투명한 유리창 저편의 돌담을 먹색과 장지가 만들어내는 안으로 깊게 수렴하는 고유한 먹의 색감 위에, 거칠고 메마른 갈필로 그려낸다. 유리창 너머의 돌담을 바라보며, 한 획, 한 획 수만 번 붓칠을 거듭한다. 그는 자신의 작품 속 돌담에 소리없이 불어오는 바람, 유리창 저편에 흐르는 보이지 않는 흐름을 담으려 하는 것이 아닐까.

섬인 제주에는 해마다 태풍이 수차례 지나간다. 거친 비바람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무너지지 않도록 담을 쌓아야 한다. 그런데 제주 돌담은 바람 그물이라 불릴 만큼 작은 구멍들이 뚫려있다. 돌들을 반듯하게 깎아서 틈없이 두껍게 쌓으면 오히려 거친 바람에 맞서 무너지고 만다. 그러나 바람이 빠져나갈 길을 틔워주면 거센 바람에 흔들릴지라도 제자리로 돌아와 무너지지 않는다. 제주 돌담은 자연에 맞서기보다, 안과 밖으로 유연하게 흐를 수 있는 틈이 있기에 그 자리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작가는 그 틈들을 관찰한다.

저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하늘과 맞닿은 고즈넉한 돌담은 유리 너머의 외부에 있다. 돌담은 외부와 맞닿아 있으면서 작가가 거주하는 공간의 내부와 맞닿아 있다. 작가는 유리창의 미세한 흔들림으로 바람을 느낀다. 돌담 밖에서 돌담과 맞부딪히는 바람은 어느새 작은 틈새를 통해 유리에 닿는다. 돌담은 내부와 외부를 잇고 있다. 작가의 그림에는 보이지 않는 공기가 지나듯 내부와 외부를 자연스럽게 흐른다. 내부는 어느새 외부가 되고, 외부는 또 다시 내부가 된다. 이 세계는 서로가 맞닿아 있는 관계들로 구성된다. 돌과 돌이 맞닿아 놓인다는 관계성 속에서 돌담이 만들어진다. 대지가 품고 있었던 돌들이 하나씩 땅 위에 놓임으로써 스스로의 존재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돌들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다른 돌들과 대립하지 않는다. 돌은 자신의 본성에 매몰되지 않고, 이질적인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난다. 그것은 그렇게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자신으로 존재한다. 작가는 자신의 돌담에 그러한 자연의 섭리를 담는다. 돌과 담, 그리고 넝쿨을 그리고, 하늘과 멀리 보이는 나무들을 그린다. 하지만 작가가 그려내는 것은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돌의 틈새이다. 거센 바람이 막힘없이 스쳐 지나갈 수 있도록 함으로써 돌담은 그 자리에 존재한다. 그렇게 자신의 본성에 어울리게 그렇게 존재하는 것은 아름답다. 우리 고유어인 ‘아름다움’에서 아름은 ‘나’ 각자의 존재를 뜻하는 말이다. 자연이 자연답게 존재하는 것, 그 아름다움을 작가는 그린다.

비움, 그리고 채움

이창희 작가가 그려낸 돌담이 있는 풍경에는 나지막이 스치는 바람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작가는 섬세한 감성으로 보이는 물질과 보이지 않는 흐름을 포착해 낸다.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로서의 돌담은 전체로서의 자연을 온전히 드러낸다. 그 충만함을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돌과 돌을 맞닿게 켜켜이 쌓아 올린 돌들 사이에 난 작은 틈이다. 이창희 작가의 작품 속 돌담은 비움으로 그 존재를 충만하게 채우고, 가득 채움으로 비움의 자리를 담고 있다. 돌담은 그렇게 그 사이를 잇는다. (글/ 아트노이드178 대표 박겸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