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간 작업을 이어온 작가라해도, 작품을 창작하는 일은 ‘알 수 없는 그 무엇(je ne sais quoi)’과의 만남의 연속이라
고 한다. 우연한 기회에, 혹은 오랜 사유 끝에 혹은 수십 번의 드로잉 끝에 작품이 시작된다고들 작가들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곤 한다. 그러나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아! 이거다’, ‘이걸 만들어 보고 싶다’라는 각성이 일어나는 순간, 작가들은 일
종의 내가 반드시 만들어 내야할 어떤 대상을 만난 기대감과 마음을 들뜨게 하는 경이로움과 같은,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느낌을 받는다. 작가들이 느끼는 ‘그 순간의 벅차오르는 감정’이 작품으로 세상에 나오게 하는 힘이 아닐까.
이번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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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크롬 계열의 페인팅 작업을 해온 김창영 작가는 다른 방해요소 없이 이미지와 붓터치로만 드러나는 표면을 위해 캔버
스에 젯소와 색을 칠하고 사포로 갈아내는 섬세한 작업을 반복한다. “그림을 그리되 아무 것도 그리지 않는” 작가가 화면
에 담아내려는 것이 무엇인지, 그의 작업 도구들과 에스키스를 통해 가늠해볼 수 있다.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이 저지르는 일상의 폭력에 대해 예민한 감각으로 사유의 전환을 제안하는 김형주 작가는 검
정비닐과 관련된 소재를 선보인다.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작가들이 어떤 사전작업을 하고, 그로부터 사유하며 작품으로 발
전시키는지 그 과정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로운 자기 표현을 억누르도록 무언의 강업을 하는 체계와 그것에 순응하지 않고 스스로의 가치, 인간 본연의 자유로
움으로 존재하기 위한 비판적 의식을 담아내는 작업을 해온 박광선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작품과 함께 아이디어를 발전시
켜나가는 과정의 기록을 공개한다. 합판으로 작업을 해온 작가의 조형작업 도구들도 엿볼 수 있다.
내면의 이야기들을 ‘어머니의 손’이라는 모티브로 승화시킨 39가지의 에피소드, <푸른소요> 도자조각 시리즈를 선보인바
있는 송지인 작가는 ‘마음의 성소’가 되는, 공감과 위로를 위한 조형물을 만든다. 도자조각은 흙으로 조형하고, 색을 입히
고 가마에서 구워내는 지난한 과정 속에서 하나의 조형물을 완성한다. 작가는 조형작업과정과 사유의 편린들을 공개한다.
미묘한 색감과 붓터치로 진동하는 듯한 공간을 감성적으로 표현해온 이은미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작품 <달빛 아래>의
작업화 과정을 공개한다. 작가는 구석, 그림자가 드리운 공간, 얼룩진 흔적 같은 공간들을 무심하게 드러내는 작업을 해왔
다. 작가가 밤 산책길에 만난 풍경에서 출발한 이번 작품에서 강변의 물이 달빛에 부딪혀 흘러가는 매혹적인 순간을 엿볼
수 있다.
사회 계층간의 위계나 권력을 향한 개인들의 욕망과 취향을 시각화한 작품을 선보여 왔던 최은숙 작가는 자신의 작품세계
를 형성하는 시작점이 되었던 지극히 개인적인 에피소드, 그리고 신작들과 함께 그것을 시각화하기 위해 수집해온 자료들
과 에스키스북을 공개한다.
개인의 기억으로만 존재하게 되어버린 장소, 자본과 경제의 논리로 사라져버린 집단의 역사의 공간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작품화하는 최정수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리서치 예술프로젝트 미디어작품 ‘제주圖’과 그 작업 기록들을 함께 펼쳐놓는다.
한 개인의 기억을 통해 ‘다시 생명력을 부여받은 집단의 역사’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