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두 개의 선(線)

김태은, 신나라, 임지연

LINE : 두 개의 선(線) 展 : 맞섬에 대한 미적 형식실험 ● 세계는 거대한 맞섬의 공간이다. 우리의 시선, 감촉, 그리고 사유 모두 무언가 마주함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떤 대상이나 세계와 마주한다는 것은 낯설다. 상대를 이해할 수 없어서 불안한데도, 이 도대체 파악하기 어려운 세계를 이해하고 싶어서 우리는 힘들고 괴롭다. 애써봐도 그저 나와 다르다는 것만을 확인할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 다름을 확인하는 순간, 우리는 어떤 선(LINE)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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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와 마주한 세계,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선(LINE)이 있었다. 그 선은 마주한 세계의 윤곽을 드러내며 첨예화를 가능케 하는 공간이다. 그렇게 세계가 드러난다. 동시에 나(I)도 존재한다. 아니, 비로소 나(I)로 존재한다. ● 나 자신도 모르는 나와 만난다. 우리는 "의미나 질료의 연속이 낯섦과 교차하면서 부러짐을 겪는 윤곽, 열림과 불연속화(J.L.낭시)"로 작용하는 경계선 앞에서 자신이 욕망, 불안, 그리고 '아직-(무엇인지 말하기 어려운 그런 상태의 아직)'과 마주한다. 자신과 마주한 세계는 불현듯 '왜 나는 이런 선택과 마주하고 있는지' 묻는 듯하다. 아니, 왜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는 '나'인지를 묻고 있다. 이런 경계선과의 마주함은 일종의 각성과 같은 경험이다. ● 전시「LINE : 두 개의 線」에 참여한 작가, 평론가, 기획자 세 사람은 자신의 경계를 조금씩 무너뜨려 새로운 경계선과 마주한다. 역사 속에서 벌어진 수많은 대립의 결과들, 엄청난 벽처럼 느껴졌던 세계와 맞부딪힌 경험들, 선택을 유보했지만, 영원히 외면할 수 없는 결단의 순간들. 이 체험 앞에는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경계가 항상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을 지켜준 공고한 벽이었고,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한 거대한 틈이자, 보이지 않는 선이었을 것이다. ● 「LINE」전은 이 보이지 않는 선들에 대한 3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다. 대립, 선택, 믿음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미적 실험의 결과물들은 관객들도 경험했을 각자의 선(線)들과 공명할 것이다. 왜 전시 제목에 '두 개의 線'이라는 부제가 달렸는지에 대해서는, 「마주선 자들」, 「믿는 자들」, 그리고 「선 위에 선 자」와의 대화 속에서 직접 확인해보기 바란다. ■ 박겸숙

「마주선 자들」 작가노트 ● 세계는 수많은 경계로 이루어져 있고, 선은 세계를 구성하며 동시에 경계를 나누는 요소이다. 경계는 언제나 무너지고 동시에 새롭게 구축된다. 반복되는 현상은 경계의 사이에 있는 존재에게 끊임없는 불안감을 안긴다. 수신이 불안정한 주파수에서 생겨나는 노이즈, 선이 강조되는 풍경, 퍼포머의 반복적인 행위, 텍스트의 나래이션은 작품의 구성요소로 작용하며, 경계선에 위치하는 존재의 애매함과 불안함을 증폭시킨다.

나는 세계와 맞섰던 순간들을 병렬편집하고, 미니멀리즘 사운드로 반복성을 강조하거나 경계선을 마주했던 감정들을 영상으로 치환하는 작업을 통해, 어떤 선(線)과 마주한 자들이 들려주는 기억의 편린들을 이미지화했다. ■ 신나라

「선 위에 선 자」 작가노트 ● 세상에는 불가피한 대립들이 가득하다. 선은 그런 대립을 가시화하는 형식이다. 우리는 항상 이쪽 아니면 저쪽이다. 그 어느 쪽을 선택하지 못한 자들은 어떻게 되는가? 아슬아슬 선 위에 올라선 자의 모습에서 출발한 글이 짧은 이야기가 되었다. 선에 오른 인물은 소극적임에도 자신의 존재를 건 투쟁을 한다.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과거를 딛고 하지 않는 편을 선택했던 바틀비처럼. 소설의 형식을 선택한 것은 내게 하나의 실험이다. 적절한 형식이라는 것은 내게 언제나 의문점이기 때문이다. 평론이라는 형식의 글이 무엇인가에 대한 풀어냄이라면 소설은 그려냄이 아닐까. 어느 때 풀어내고 어느 때 그려내야 하는가. 그 사이에서 고민하면서도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못하는 것은 나 또한 선 위에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 김태은

「믿는 자들」 기획노트 ● 예술-종교-학문은 나에게 같은 뿌리에서 나온 다른 모습들이다. 일체의 생산 활동을 가능케 하는 실질적인 힘으로서, 나는 이들 세 가지를 인간의 근원적인 생명력이 발현되는 '다른 모습의 같은' 운동이라 생각한다. 이번 전시에서 나는 통상 종교적 형태로 나타나는 인간의 '믿는 마음'을 탐구하고자 했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또 우리는 무엇을 믿는 것일까? 사실 이런 물음을 내가 구체적으로 묻기 시작한 것은 불과 4~5년 전이다. 그 전까지는 의식적으로 믿음으로부터 거리를 두려고 했던 것이 사실이다. 사람의 믿는 마음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서글퍼지고 우울감이 깊어져 다른 일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내 몸에 박힌 믿음의 운동은 그렇게 어둡고 슬프고, 울고 있을 뿐이었다. 우연한 계기로 - 과연 우연이라 말해도 될런지, 내 지력의 한계, 즐거운 무지 - '믿는 자들'의 눈빛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 뒤로 각성 : '언제나-이미' 나와 함께 울고 있던 사람들의 믿는 마음들. 각성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가야할 길은 멀다. 그 도정에서 내 믿는 마음의 매듭점들을 만들어준 이들의 목소리를 여기에 남긴다. 이는 내 개인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인간이 지닌 믿는 마음의 구체적 형상을 남기는 일이기도 하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기꺼이 행하는 마음, 믿음은 영원한 짝사랑이다. ■ 임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