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주
조망에서 관찰로, 관심에서 환대로 ● '이 상반된 거리감은 무엇이지?' 2019년 김형주 작가의 개인전 『이름 없는 공간의 무게 – 가벼운 풍경』의 작품들과 이번 전시 『초대받지 않은 손님』의 작품을 함께 두고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이다. 멀리서 산을 조망하는 전자의 시선과 가까이에서 잡초들을 관찰하는 후자의 시선 사이의 차이가 크게 느껴진 탓이다. 작가가 주목하는 대상이 산과 잡초라는 자연물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변화가 갖는 의미를 찾고자 하는 마음은 더욱 커졌다. 주지하듯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살피는 일은 인류의 오랜 성찰 주제이며, 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 상황은 단지 성찰만이 아니라 당장 행동의 실행을 요구하고 있다.
'조망에서 관찰로, 산에서 잡초로.' 김형주 작가의 이번 전시에서 시대 변화에 대응하는 예술가의 운동을 발견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변화를 일으키는 실행은 삶의 현장, 각자의 외진 방 안에서 시작된다. ● '조망에서 관찰로'라고 말했지만, 실상 양자는 각각 서구 근대의 미학적 태도와 과학적 태도를 지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서구 근대의 이상은 자연과 인간을 철저히 분리하고, 두 세계를 각기 다른 순수하고 자율적인 원리로 구성하는 것에 있었다. 이때 구성의 주체는 인간의 이성이다. 명석 판명한 진리를 추구하는 이성은 영역 간 경계를 짓고 서로가 상호 침범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한다. 우스운 것은 이성이 그리 하도록 허용한 자는 (신의 위상을 빌린) 인간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인간은 자연도 자기 마음대로, 또 인간 자신도 그 이성의 원리에 따라 좌표계의 점 정도로 규정한다. 인간중심과 이성중심의 특권적 사고 속에서 인간은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간다. 거칠게 날뛰는 인간 안의 자연, 즉 욕망을 잠재우고 초연하고 무관심한 태도로 자연을 조망할 것, 이성의 힘으로 자연을 면밀히 관찰하여 그것의 객관적 법칙을 발견할 것. 자연의 법칙을 발견함으로써 결국 자연을 쓸모 있는 도구, 즉 이윤(interest) 창출을 위한 수단으로 삼아 온 인류의 역사를 생각하면, 무관심성(disinterestedness)을 강조하는 미학적 태도는 서구 근대의 과학적 시선에 덧입혀진 탁월한 포장술이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자연의 등골을 죽-죽- 빨아 먹으면서도 '이 아름다운 자연을 보라'며 감탄하는 분열적이고 이율배반적인 모습의 인간이랄까?
김형주 작가의 시선 운동을 보자. 먼저 그의 '조망' 운동은 '이름 없는' 산 앞에서 펼쳐진다. 언어가 발생한 태초의 모습을 떠올리면 한 사물의 이름은 무작위적으로, 그야말로 순수한 자유 속에서 부여된다. 한 사물이 반드시 그 이름일 필연적인 이유나 근거는 없으며, 이러한 무근거한 자유야말로 사물의 존재 근원 상태를 보여준다. 언어의 이러한 발생적 사건성은 약속 내지 문법 등의 이성적 체계로 사후 환원적으로 설명됨으로써 한차례 퇴색된다. 나아가 언어의 본질이 일반 문법 내에서 추상화되면 될수록 자본과 이윤이라는 또 하나의 추상 운동, 그 숫자 놀음 속으로 탁월하게 습합된다. 김형주 작가의 조망하는 시선이 산의 이름 없는 지점을 맴도는 것은 언어와 자본 운동이 일으키는 추상 운동의 '가벼움'에서 벗어나, 산 본연의 무게감, 즉 '산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느껴지는 중력을 우리 의식에 부여하려는 지향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자본의 크기대로 팔려나간, 쓸모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자연은 텅 빈 채 '가벼운 풍경'으로 남지만, 이름 없는 산은 쓸모 이전의 '존재 그 자체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그의 조망 운동은 서구 근대의 무관심한 미적 태도가 일으키는 운동과 다르다. 그의 시선에서는 진공상태의 추상성을 벗어나 존재 그 자체를 '향한' ('대한'이라 쓰지 않고 의식적으로 '향한'이라 표현하였다) 무한한 관심을 읽을 수 있다. ● 김형주 작가의 '조망'하는 시선은 '관찰'하는 시선으로 옮겨 오면서 육체성을 획득한다. 이름이 없다는 인식론적 환기와 존재 그 자체를 향한 관심으로의 전환은 '초대받지 않은' 존재를 대하는 작가 자신의 태도 변화를 수반한다. 시선이 몸을 입자, 단순히 보는 일에 그치지 않고 무엇인가를 행하는 행동의 주체로 변모하는 것이다. 이때 인간 일반의 이율배반은 작가 자신을 변화시키는 성찰의 기초이다. 자연에 대한 자본의 폭력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기적으로 작업실 마당 잔디를 깎고 잡초를 뽑는 자신의 행위를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설명은 자기 정당화의 과정이고, 이는 윤리적 문제 앞에서 최소한의 자기 안위를 보장한다. 쉽게 말해 자기 마음을 편하게 하는 일이며, 실상 대부분의 이성적 설명과 논리는 이러한 이기적 편안함과 쾌적함을 목표로 한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호언장담이나 인간 중심의 이해를 요구하지 않는다. 잡초는 아무리 제거하려 해도 절멸되지 않는다. 마당의 주인에게 잡초는 시시때때로 나타나는 불청객이다. 잔디들도 잡초를 싫어하는 것만 같다. 그런데 이 모든 좋고 싫음의 판단은 누가 하는가? 이 마당에서 정작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님인가? 작가는 양자를 가르는 판단 주체의 중심적 시각을 내려놓고 잡초를 맞이한다. 맞이하는 일은 눈으로만이 아니라 손과 발, 냄새와 촉감과 소리, 땀과 피부, 호흡과 운동 속에서 일어난다. 누군가를 맞이하는 일은 감각의 총체, 몸 전체로 행해진다. 김형주 작가의 관찰하는 시선은 자연의 질서 내지 법칙 수준으로 정리되는 차갑고 딱딱한 이성의 형식을 찾아내려 하지 않는다. 그의 시선은 수분을 머금고 있다. 물은 풀과 나무를 자라게 하며, 검은 먹은 푸른 성장력을 품고 있다.
김형주 작가의 지난 전시와 이번 전시에서 발견되는 '조망과 관찰'의 시선은 곧 '관심과 환대'라는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활동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를 보는 일에서 존재를 맞이하는 일로의 전환은 인식의 확장을 비롯하여 몸으로 터득한 작가의 삶의 지혜를 보여준다. 이름 없는 존재를 향한 작가의 따뜻한 관심과 너와 나의 경계를 넘어선 열린 만남 속에서 생명 가치를 중심으로 한 미학적 태도가 발견된다. 바이러스 팬데믹 등 생태 위기의 현실에서 우리가 수행해야 할 실천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 (사족) 작가의 시선이 다음 전시에서 어떤 운동을 일으킬지 사뭇 기대된다. 직관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늘을 날던 작가의 시선이 이제 땅 위에 내려앉았다. 땅 위를 구르는 눈은 어떨 때는 꼭 감기도 하고 어떨 때는 크게 뜨기도 할 것이다. 풀에 부딪히기도 하고 구덩이에 빠지기도 할 것이다. 구르다 먼지투성이가 되기도 하고 갑자기 쏟아진 비에 깨끗이 씻기기도 할 것이다. 벼락을 맞기도 하고 뜨거운 태양에 까맣게 타기도 할 그의 눈... 생명 운동에 기꺼이 뛰어들면 따로 시선이라고 할 것도 없이 눈은 곧 몸과 하나가 될 것이다. ■ 임지연
잡초에 대한 시각 탐구는 계속되어, 유예된 공간에 피어난 잡초에 대해 작업을 하고자 한다. 근처의 '이름 없는 산'에 대한 사유가 코로나로 인하여 집 앞 자연에 대한 사유까지 오게 되었으며, 필요에 의해서 생산되고 꾸며진 것이 아니라 자의적으로 생성된 자연물들의 현상이 자연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도시 속 유예된 공간의 무성한 잡초를 보면서, 여전히 자연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자연은 멀리 있는 것도, 또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것도 아닌, 아주 가까이 내 주변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임을 말하고 싶다. 자본(욕망)으로 결정되는 모든 순간들을 막을 수 없지만, 머뭇거리는 태도를 갖게 되길 바란다. ■ 김형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