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필교 개인전: 홀로 피는 꽃은 없다

박필교

사이의 존재, 푸른 꽃 ● 마치 재난 영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일들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쉴 틈 없이 바삐 움직이던 회사, 공장, 학교는 물론 밤낮없이 인파로 넘쳐나던 도심이 멈춰버렸다. 비대면이 일상이 되었고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이벤트는 모두 사라져 버렸다. 언제나 붐비던 공항도, 만원사례를 기록하던 야구장도, 줄을 서지 않고는 탈 수 없던 유원지도 텅 비었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전대미문의 사건은 우리에게 혼자, 이 시간을 버티라고 한다. 예술은 이 고달픈 시기를 어떻게 담아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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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장에서 만나는 동시대 작품에는 지금 이 시대가 당면한 시대적 문제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반영되어 있다. 작가들은 그런 현실을 뒤틀거나, 전혀 다른 코드로 전환해서 작품에 투사한다. 세계와 자연, 인간과 사회 그리고 보이지 않는 힘들이 얽혀 있는 상황 속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잡아낸다. 이렇게 작가의 손에서 마무리된 팽팽한 균형이 출발점이다. 이 균형이 깨지는 순간 작품은 완성된다. 그 결정적 순간은 작가의 손을 떠나있다. 그것은 절묘하게 창안된 작가의 세계 앞에 선 관람자가 쥐고 있다. 이제 관람자의 차례다. 균형을 이룬 긴장감을 무너뜨릴 준비가 된 틈으로부터 시작되는 대화에 응할 타이밍이다. 관람자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작가는 전시장에서 자신의 작품이 복수(複數)의 작품으로 완성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COFFEE AND COUPLE ● 작가의 예리한 촉에 포착된 카페다. 혼자 커피를 마시려던 작가의 시선에 들어온 카페 이름이 텅 빈 내부와 겹쳐진다. 커플이란 단어에 부응해야 하나 싶어 머뭇거린 걸까. 물끄러미 바라보는 작가의 뒷모습이 상상된다. 유리창에 비친 것이 작가의 실루엣일까. 작가의 모습을 찾는 시선이 다시 커플이란 단어에 머문다. 낯설다. ● 이 낯섦의 이유는, 작가 박필교의 작품에는 언제나 본인이 등장해왔기 때문이다. 여러 명이 등장한다 해도, 모두 작가였다. 그의 작품에는 본인이 유일한 등장인물이다. 자화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박필교 회화의 시그니처는 강력하다. 먼저 질문이다. 만약 아무도 없이 나 혼자인 시간,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남몰래 스릴 넘치는 일탈을 감행한다면 당신은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작가는 발칙하면서도 과감한 상상을 화폭에 구현한다. 관람자가 당혹스러울 정도로, 그의 일탈은 발칙하기 그지없다. 당황의 끝에 피식 웃음이 배어 나온다. ● 일상적 공간에 홀로 등장한 30대 평범한 남성은 벌거벗은 채로 대담하게 혼자 놀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러나 작가의 과감한 선택은 첨예한 성적(性的) 갈등이나 예민한 논쟁들을 가로지른다. 심지어 제3의 지점에서, 새로운 전환의 코드라고 이름 붙여주고 싶은 위상을 점유한다. 다른 이의 몸을 희화화함으로써 폐를 끼치거나, 남성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일 수 있는 우려를 거의 말끔히 털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위선적인 어떤 제스처도 뺀 자신의 벌거벗은 몸에 어쩌면 자조적으로 보일지 모를 거침없는 유머를 담아낸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는 '남들의 시선과 사회적 관념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라는 옷을 입게 되었다고 말한다. 작가의 긍정적이고 선한 의도는 작품 속에서 진실된 힘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억압을 벗어버리고 싶은 욕망은 '나 자신'으로 살아보고자 하는 근본적인 욕구인 자유로 점차 확장되었다.

사회 속 틈(interstice) ● 화려한 색과 놀이기구로 가득한 꿈과 환상의 장소. 놀이공원이다. 조명이 한껏 화려해질 어스름한 저녁 무렵, 놀이공원이 가장 인기 있는 시간이다. 그러나 이 놀이공원에는 언제나처럼 작가 외엔 아무도 없다. 이제 본격적으로 작가의 자유가 폭발한다. 억압은 자유에 대한 갈망을 증폭시키는 법이다. 음주 불가 놀이동산에서 알코올 헬멧과 빨대를 장착하고, 모든 '옷과 장신구'는 벗어버렸다. 그런데 눈을 사로잡는 이미지에 조금만 덜 신경쓰면 보이는 게 있다. 규칙적으로 보이는 백색의 틈이다. "틈은 개방적이고 조화롭게 편입되어 현존체계에 위협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현존체계를 교란하는 미세한 구멍과 같은 것(관계의 미학)"이라고 '사회 속 틈'으로 설명한 니꼴라 부리요의 말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작품에 그려진 틈은 그어진 흰 선처럼 화면 위에 올려진 것인가. 놀이공원의 대관람차를 배경으로 서있는 작가 박필교의 이미지를 조각내서 벌려 놓아 생겨난 것인가. 그도 아니라면 흰 면에 넓은 틈의 형태로 이미지가 끼워진 것인가. 혼란스럽다. 틈을 신경쓰기 시작하니 또 하나 문제가 생긴다. 작가와 관람자 사이에 가로놓인 세로의 틈이 울타리 창살이라면? 작가가 창살의 안쪽에 있는 것은 작가인가, 바라보는 우리인가. 화면 전체의 구성이 교란된다.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하나의 이미지를 위해서는 둘이어야 한다' (장 뤽 고다르) ● 혼돈의 시선은 바다로 이어진다. 짙푸른 바다 위에 선 작가는 사실 튜브 욕심을 맘껏 내야 하는 처지이다. 그러나 수영을 못한들 어떠한가. 이곳에선 타인의 시선은 없다. 작가는 언제나처럼 벌거벗은 채, 혼자다. 그런데 다시 의심이 든다. 과연 혼자일까? 전시장의 벽에 파묻히듯 창틀을 메운 작품을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위험을 알려주고 싶다. 중력의 압제에서 벗어나 물속에서 유영하며 자유로운 몸짓으로 즐기고 있는 작가의 뒤에 나타난 극강의 위험에 눈을 뗄 수 없다. "돔황챠"라고 나지막이 말한 것은 어쩌면 작가 자신이 아닐까. 관람하는 우리도 도망치라고 말하고 싶으니 말이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너와 내가 설정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제3자의 자리를 설정한다. 작품 속에 그려진 박필교와 그리고 있는 작가 박필교는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혹여 정면을 보는 상황이라면 안경이나 선글라스가 등장한다. 작가는 자연스럽고 부담스럽지 않은 '중간 시선'을 도입했다. 작품 속 등장인물은 혼자일지 모르지만, 그것을 둘러싼 인물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작가로서의 박필교와 마주하고 있다. 또 등장인물 박필교가 그려진 이미지를 촬영하는 있는 렌즈 속 시선과도 마주한다. 이러한 시선들은 모두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 적절한 거리 감각은 관람자들에게 이미 익숙하다. 이것은 작품을 보는 시선에 관한 문제로,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문화 코드이다. 작가는 보편적인 회화의 감상법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도, 남을 의식하지 않고 홀로 자유를 누리려는 욕망과 동시에 모든 순간을 공개하고 주변의 시선을 갈망하는 현대인의 욕망을 동시에 드러낸다. ● 이처럼 모든 예술 작품은 작가와 관람자와의 관계에서 완성되어야 하기에 혼자가 아니다. 최소한 '둘'이 필수조건이다. 관람자의 개입은 이미 출발부터 전제된다. 관람자의 자유롭고 개방된 시선을 매개로, 작가 박필교의 작품이 갖는 의미도 비로소 생성된다. 그는 보편적이지 않은 이미지를 통해 보편적인 인간의 사건, 즉 인간 내면의 욕망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다양한 해석으로 매 순간 탄생되어야 한다.

결국은, 자유 ● 작가 박필교는 홀로 있기에 가능한 자유를 그리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는 혼자 있는 세상 속에서는 불가능하다. 실제로는 현실에서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고 그는 생각한다. 오히려 억압이라는 부정성이 있기에 더욱 자유를 갈구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단단하고 좁은 틈을 겪어봐야, 탁 트인 공간의 소중함을 안다. 그래서 작가 박필교는 존재하는 틈을 찾는다. 단단한 시멘트 벽의 틈새에서, 전시장의 외부와 내부가 맞닿은 벽 틈을 비집고 나온 푸른 꽃은, 자유로우려고 애쓰지만 현실은 억압 속에 머물러 있는 "사이의 존재"인 작가 자신이다.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수준에 대한 타인의 시선이나 기대는 언제나 버겁다. 간절히 그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없음에, 스스로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모든 불편함과 위협에 좌절하고 굴복하지 않는다. 사회적 규범상 드러내서는 안되는 것이라면, 작가는 작품으로 드러내면 된다. 현실이 고되고 답답할수록 간절해지는 인간 본성을 유머를 통해 웃음으로 이겨내고자 한다. 자신의 작품을 보며 웃음짓는 관람자들을 기다리는 작가 박필교에게 가장 중요한 화두는 결국 자유다. ■ 박겸숙

복잡한 삶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싶은 생각을 이따금씩 하게 된다. 타인의 시선과 기대에 부응하려 발버둥 칠 때, 사회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허덕일 때, 여러 가지 관계에서 오는 갈등에 고단함을 느낄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럴수록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온전히 나를 위한 세상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소망하게 된다. 사회적 구조에 맞춰진 내가 아닌 자유롭고 직관적으로 살아가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며, 과연 그러한 삶을 사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디까지 가능할까. ■ 박필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