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영, 박광선, 박필교, 윤상윤
회화는 베일이다. 회화는 감추고 지워냄으로써 더욱 명확히 무언가를 드러내고, 뭉개거나 그리되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마주하려 하거나, 노골적인 드러냄으로 오히려 드러남 그 자체를 가리는 이중적 은유의 경계에서 완성된다.
베일은 무엇을 가리고 있는가. 아니 외려 정확하게 그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있음과 없음, 재현의 성립과 포기 그 사이, 실재의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베일은 부드럽기보다는 날카롭다.
무엇보다 첨예한 베일의 끝을 겨냥한, 회화의 ‘지금-여기’를 아트노이드178의 두 번째 전시 < 베일 듯한 베일 >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전시에는 아트스페이스 휴+네트워크 창작스튜디오 입주 작가 김창영, 박광선, 윤상윤, 박필교 4인이 참여한다.
부유하는 이미지들 : 감춤의 역설 이렇듯 김창영의 작업은 일견 관객을 당혹스럽게 할 수도 있다. 작가의 작품 앞에 설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깜빡이며 명확한 것을 찾아 캔버스의 위 어딘가를 헤맨다. 그러나 보고 있지만 가려진 듯 볼 수 없다. 이 짧은 조우에서 감상행위에서 당연히 요구되는‘본다’라는 행위는 방해받는다. 작품들은 가려진 곳 하나 없이 벽에 걸렸지만 캔버스 안은 오롯이 보이지 않으면서 (무엇인가를 보러온) 관객을 좌절시킨다.
부유하는 이미지들, 또렷이 잡히지 않는 형태, 모호하게 드러나는 붉은색과 푸른색 그리고 아른대는 빛과 그림자. 그것이 이제까지 작가 김창영이 자신의 작업에서 드러낸 것들이자 우리가 김창영의 작업에서 보는 모든 것이다. 아니, 사실은 그렇게 착각해온 것이다. 캔버스에 보이는 것은 작가가 드러낸 것이 아니라 덮고 감추어 남긴 것이고 관객이 보는 것은 모든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일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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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시란 한 동안 바라본다는 것을 포함하여 현상 아래 깊숙이 숨겨져 있는 본질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김창영의 작업들은 스쳐 지나가듯 볼 수 없는 작업이다. 봐야할 것이 많아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감추는 것이 많아 머무르는 것이다. 그의 작업은 관객에게 시간을 들여 머무르게 하고 더 오래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직관적인 방식이 아니라 응시를 통해 시간을 들여 관조해야 하는 대상으로써 관객에게‘봄’이라는 일종의 적극적인 사유행위를 요구한다. 실체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화면에서 시선은 표면을 두서없이 배회하다 어느 한 지점에서 다시금 내부를 들여다보도록 밀어붙여진다.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해 관객이 마음을 기울여야 말하자면 시간을 들여야 하는 만큼 작가 또한 보여주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더 정확한 빈 공간을 구현하고자 여러 번의 칠하고 갈아내는 밑작업에서부터 수십 번을 반복해 얹고 다시 덮는 정교하고 섬세한 그의 전 작업 과정은 양적이고 질적인 시간을 동시에 요한다. 이러한 방식은 작가의 작업 전체를 아울러 맥락을 같이 하는 하나의 고행이다. 물리적인 수고와 그 지난한 과정이 켜켜이 쌓이지만 작가는 그것마저도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표면에 배어나올 하나의 드러냄을 위해 작가가 묵묵히 감내해야만 하는 시간인 것이다. 희미하게 배어나오는 중첩된 레이어들은 지나가 버린 시간이자 동시에 덧쌓인 시간이며 그 모든 흔적의 기록이다. 이 모든 것은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작가가 느끼고 구상한 세계를 더 잘 드러내기 위한 감춤의 역설인 것이다.
이번 작업들은 김창영의 기존 작업에서 이어지는 큰 흐름에서부터 더 나아간다. 처음 그의 작업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하나의 세계로 구축하는 동시에 눈에 보이는 것들이 명확하다고 믿고 알고 있다고 생각하여 관념으로 굳어버린 것들을 사정없이 흔드는 데서 출발했다. 친숙한 이미지들에서 출발하지만 수없이 덮고 지우고 또다시 덮는 과정을 통해 흔들리는 그림자의 형태로 드러나는, 모호하게 흔들리는 평면을 완성해왔다. 작가가 받아들여 구성한 세계는 그 안에서 단조롭지만 유동하는 선들로 치환되었다. 이번 작품들에서 작가는 자신 또한 사실은 어떤 이미지에 대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자각하고 이를 탈피하고자 그나마 부유하듯 남아있던 이미지마저 덜어내는 방식을 선택한다. 이것은 지금까지 김창영이 진행해온 일종의 실험의 연장선이다. 이제 작가는 자신의 실험을 더욱더 밀도 있게 밀어붙인다. 이것은 단순히 형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회화의 본질적인 요소를 찾아 헤매는 시도인 것이다.
이제 김창영의 작품 앞에 머물러 그 어느 때보다 의도적으로 들여다보아야 한다.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곡선과 직선의 겹겹이 아른대는 경계와 희미하게 진동하는 움직임을 고요한 표면 어딘가에서 찾아야 하고 들어야만 한다. 화면에 펼쳐지는 형식적인 요소들의 대립과 조화는 그 자체로 눈에 쾌감을 불러일으키지만 거기서 멈추기에는 김창영의 작업이 계속해서 우리를 자극한다. 가장 절제되고 정적인 작가의 작업들은 오히려 격렬하게 보기를 요구하고 사유할 것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그림 앞에 선 관객의 행위는 드디어 완성되고 그 자체로 완성된 것으로만 보이던 그의 작품도 더 나아가 평면으로, 아니 회화라는 작업으로 관객을 만나는 하나의 사건으로 완성된다. 때때로 이 시도는 실패할 수 있다. 관객은 작품이 말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서성이다 그대로 발걸음을 옮길 수도 있다. 그러나 김창영의 작업들은 본질적인 질문들을 표면 아래 품고서 언제든 드러낼 준비를 하면서 고요함 속에 일렁인다.
아무리 식상하다고 해도 이제 다시금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무엇을 어떻게 보여주고 보아야 하는가? 결국 회화가 무엇인가를 물어야만 한다. 이 질문은 동시에 작품 앞에서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로 연결된다. 거창하다면 너무 거창한, 뻔하다면 지나치게 뻔한 이 질문이 김창영의 작업 앞에서는 자연스럽다. 빛바랜 듯한 화면 아래 펼쳐지지 못하고 조용히 숨 쉬는 진동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자연스레 이 질문으로 회귀하게 된다. 당연히 보여주겠지와 그냥 보면 되겠지 사이의 간극을 작가의 작업은 한순간에 뛰어넘는다.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작가는 더욱더 볼 것을 요구하고 보이지 않기에 관객은 적극적으로 보게 된다. 김창영의 작업은 무엇을 보아야 하고 어떠한 방식으로 보야야 하는가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답변이고 일종의 수줍은 선언이 아닐까. ■ 김태은
사각(四角)의 퍼텐셜
내려앉은 어둠이 무겁다. 사각의 방, 홀로 남겨진 소년은 주변을 둘러본다. 마루를 넘어 온 빛이 지친 듯 창호지에 스민다. 밖으로 난 사각의 창에 파란 하늘이 새겨지고, 구름이며 개나리며 바람이며가 소년의 몸과 뒤섞인다. 바로 그 순간,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다.’(브라이언 마수미) 안과 밖이 나뉘는 경계는 어디쯤인가? 어둠과 빛은, 하늘과 구름은, 개나리와 바람은, -혹은 이들 모두는- 얼마나 따로 떨어져 있고 또 얼마나 함께 하고 있나?
소년의 몸에 뒤엉킨 어둠과 빛과 하늘과 구름과 개나리와 바람은 누구의 것인가? 아니, 소년의 몸은 이미 그렇게 방안의 일렁이는 사물들, 그들의 운동을 입고 있지 않나? 그의 몸에 입혀진 사물들의 운동, 그 리듬에 따라 사각의 방은 재차 변용된다. 혼자라고 여겨졌던 공간에 쓸쓸함과 그리움과 슬픔과 사랑과 호젓함과 덧없음의 감정들이 도약하기 시작한다. 사각의 공간은 더 이상 고독하지 않다. 또 정지해 있거나 폐쇄되어 있지도 않다. 그곳은 사물들의 경계가 ‘정확하게 모호해’지고, 존재함으로써 일어나는 ‘필연적으로 자유로운’ 힘들이 약동하는 공간이다. 공간에서 빚어지는 사건은 한 번 일어나고 끝나지 않는다. 사건은 그 자체 질적으로 새로운 국면을 재차 산출해 낸다는 점에서 언제나 ‘생성’ 중에 있다. 사물들의 이미지로 펼쳐지는 생의 무한한 약동, 어두운 방안에서 소년은 존재의 그 오랜 언어를 몸으로 터득하였다.
박광선 작가의 작업은 회화의 필연적 기제로 여겨지곤 하는 사각의 틀에 대한 회의로 시작된다. 회화의 사각 틀은 작가가 앞으로 구축할 세계의 존재론적 기초이다. 작가는 그 앞에서 오랜 시간 서성이며 묻는다. 코스모스로 질서 잡히기 전 그것의 어두운 과거, 그때는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나? 카오스, 힘들의 무차별적인 혼돈. 질문과 대답의 과정은 논리적이거나 순차적이지 않다. 작가의 몸이 태고의 소리에 리듬을 타기 시작한다. 망치를 든 작가의 손이 사각의 틀을 내려친다. ‘탕!’ 이는 단지 파괴적인 내려침이 아닌 ‘찢긴 디오니소스’의 창조, 작가의 세계 기반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코스모스가 세워질 카오스의 땅, 침묵을 깨는 존재함의 포효, ‘무정형의 정형’. 세견되고 매끈한 제도 미술의 불모지에 작가는 거칠게 울부짖는 존재의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
작가가 천착한 생명력의 땅은 합판이다. 개별 세계의 수집가로서 그는 누군가의 소유였을, 혹은 무엇인가에 사용되었을 합판을 모은다. 연장을 사용해 틀을 잡고 손으로 뜯어내 작품 세계의 가장 기초적인 터전을 마련한다. 그리고 그 위에 눈과 코, 입 등을 가진 개체가 구축된다. 이를 대상의 단순한 재현이라 보기는 어렵다. 기 전시되었던 < 39방 > 시리즈의 인물들은 작가가 마련한 땅에 지인들의 사진 이미지에서 가져온 형상들을 입힌 것이다. 순간을 포착한다는 사진의 잠재력은 작가의 세계 기반 속에서 본래의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한때 존재했고 앞으로도 존재할, 그러나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지는 미지의 영역으로 열려있는 한 개체의 눈이 ‘지금-여기’ 작품 앞에 선 관객의 눈을 응시한다. 합판은 꼭 그렇게 사용되지 않아도 되었다. 인물 역시 그 순간 꼭 그런 모습이지 않아도 되었다. 어떤 용도이든, 어떤 모습이든 꼭 그렇지 않아도 되었던 개체의 잠재적 힘이 불현듯 한순간 ‘표현’되었고, 그 표현물의 역동은 작가의 몸을 타고 변용되어 작품 속에 새롭게 배치된다.
작품에 존재의 힘과 역동을 재배치하고자 하는 박광선 작가의 작업 의도는
이번에 전시된 박광선 작가의 작품 < 2424 >와
< 2424 >가 개체의 사건성에 담긴 공간적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면,
어두운 방 안에 홀로 남겨진 소년은 쓸쓸하다. 그러나 쓸쓸함을 품고 있는 그 몸의 경험은 이미 그가 세계 존재와 함께하고 있음의 증거이다. 딱딱하게 굳은 이성 언어에 보다 먼저 배운 몸과 이미지와 존재의 언어, 살아있음의 역동적 힘이 포물선을 그리며 그의 사각 틀을 넘어온다. (끝) ■ 임지연
윤상윤의 re-doubling, 불가능의 가능성 귀환
세상이 각박해지고 치열한 경쟁으로 내몰릴 때, 사람들은 일탈을 꿈꾼다. 갑갑한 현실과 타자들과 맺고 있는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러나 현실은 녹녹지 않다. 사람들은 벗어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들을 놓지 못하고 더 집착한다. 단 한 번만이라도 그런 현실에서 벗어나 보면, 생각보다 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충고를 들어본들, 쉬운 일이 아니다. 서점이나 극장에 수많은 히어로물이 등장하고 있는 것은 대리만족이라도 얻고 싶은 현대인의 욕망을 반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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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어렸을 적 한 번쯤 TV에서 보았을 법한, 지구를 구하는 영웅이 등장하는 시리즈물에는 어떤 규칙이 있다. 대부분 주인공은 또래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거나, 무시당하고 심지어 이물질 취급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그 혹은 그녀는 또래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항상 의기소침하다. 그러던 어느 날 지구에 위기가 닥쳐온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그 혹은 그녀는 각성한다. 자신이 사실은 평범한 인간이 아녔음을 비로소 자각한다. 남다른 힘을 가진 존재였거나, 외계에서 온 존재였음을 깨닫는다. 스스로를 억압해왔던 ‘어떤 것’이 마침내 자기의 자리로 돌아온다. 귀환이다. 이방인이자 타자였던 주인공은 이제 영웅이다. 그 혹은 그녀는 위기로부터 지구를 구해 낸다.
빛, 그리고 변신
어둡고 불안한 기운이 가득한 절체절명의 순간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빛 그 자체이다. 주인공이 각성하는 순간은 항상 눈부시게 찬란한 빛으로 가득하다. 그때 등장한 주인공은 일상의 모습이 아니다. 변신이다. 그 혹은 그녀는 오히려 자신을 감추기 위해 마스크와 화려한 수트로 무장한다. 자신을 감추고 변신하면, 그의 능력은 배가(re-doubling)된다.
윤상윤의 작품 「In the Spotlight」, 「The Keeper of the Keys」,「The Midnight Duel」은 우리로 하여금 짐짓 진지하게 상상하게 한다. 어린 시절 한 번쯤은 보았을 장면들을 떠올리다가 스스로 깨닫는다. 이런 이야기는 유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미소를 짓고 있음을. 우리는 내색하지는 않지만, 항상 이러한 존재의 귀환을 꿈꾼다. 그것이 도래할 그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작품의 장면들처럼 스펙타클하고 신나는 순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자신의 무의식 속에 억압되어 있던 그 알 수 없는 무엇과 마주하는 그 순간이기 때문이다. 다시 그림을 들여다보게 된다. 어딘지 모르게 공허하다. 왜일까. 히어로들의 눈이 신경쓰인다. 그들의 텅 빈 듯 보이는 눈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je ne sais quoi
텅 빈 눈. 질문을 에둘러 작가 윤상윤에게 던진다. 당신은 이 작품들을 그리면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 하는지, 어떤 순간을 담아내려 했는지, 왜 그런 장면에 주목했는지를 묻는 연이은 질문에 그는 적당한 단어를 찾기 위해 조금은 시간을 들여서 대답한다. “흥미롭게 느껴지는 어떤 순간이나 상황을 포착하려고 한 것인데, 그 의미는 아직 명확히 말하기는 어려운 그런 것”이라고. 그는 ‘무심하지만 심오한 무엇’을 찾아가는 진지한 여정에서 이 장면들과 마주한 것이다. 그에게 이 작품들은 “솔직하면서도 지나치지 않으며”, “절제하고 참을성 있게 내부의 나를 관찰하는 시간”을 통해서 마주한 자신이다. 그는 그 순간을 신체의 흔적으로 기록한다. 그에게 드로잉은 “선의 속도와 누르는 압력, 그리고 명암과 색으로” 재현되는 그의 또 다른 회화언어다.
윤상윤은 오른손과 왼손으로 나누어서 그림을 그린다. 그 결과물은 다른 작가의 작품인가 싶을 정도로 전혀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손이 가는 대로, 두꺼운 붓으로 두어 번의 터치로 완성해내는 왼손 드로잉과 달리 오른손 페인팅은 ‘이드-에고-수퍼에고’로 구축된 회화적 구조물 속에 다양한 욕망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을 사실적으로 재현해 낸다. 그가 구축해가는 회화의 언어들은 이분법적인 논리체계 안에서 하나씩 분절되어가며 의미를 부여받는다. 의식과 무의식, 의미와 무의미, 필연과 우연, 수직과 수평, 기교와 절제, 작위와 무작위, 재현과 표현, 정형과 무정형, 길들여진 것과 날 것, 끝없이 양극단의 단어들이 양손의 세계를 채워간다. 그가 완성해가는 회화언어는 더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로 그를 이끌고 있다.
re-doubling, 불가능의 가능성
회화는 본래 딸이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대체하기 위해 그의 실루엣을 본따서 토기를 만들었다는 부타데스의 도공의 일화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여기서부터 회화의 태생적인 고민이 시작된다. 존재의 부재는 어떻게 표현되어야 할까. 그가 ‘지금-여기’에 ‘없음’을 드러내야 하는가, 그가 더-이상 여기에 없음을 느끼지 못하도록 ‘있음’으로, 그의 자리를 채우도록 드러내야 하는가. 이 난제를 해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회화는 또 다른 불가능에 직면했었다. 존재하지 않음, 그 자체를 재현하라. 심지어는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존재를 재현하지 말고 드러내라는 고난도 미션이었다. 베로니카의 베일은 이 난제를 멋지게 해결했다. 회화가 겪어온 수많은 사건들은 항상 ‘있음’과 ‘없음’, 그리고 ‘재현’과 ‘표현’의 문제에서 야기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여기’에서도 그 물음은 이어진다.
윤상윤 역시 이 물음 위에서 회화의 존재를 고민한다. 그가 오른손 페인팅과 왼손 드로잉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한 것은 있음과 없음-즉, 존재와 무-의 이중운동이다. 그는 양손을 통해 동시에 겨냥한다. 있음은 ‘무’ 즉, 없음의 기반 위에서 존재하고, 드러남은 드러내지 않음을 동시에 포착한다. 의식과 논리의 층위에서 구축된 오른손 페인팅은 물감층들을 쌓아 올리며 존재의 실재성을 획득하려 하지만, 그것은 실제 같은 환상을 재현한다. 반면 무의식과 우연 속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내려는 왼손 드로잉은 단순화시켜서 즉각적으로 분출되는 방식으로 드러내지만, 그것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그 무엇’을 향해 육박해 들어간다. 그는 드러내며 감추고, 감추며 드러내는 회화의 이중운동에 한 겹을 더한다. 이분법적으로 구축된 왼손과 오른손의 회화는 서로 거울을 마주한 것처럼 반대편에서 서로를 바라본다. 그리고 또 한 번 ‘다시-이중운동(re-doubling)’을 시작한다. 이분법적으로 정-반의 체계를 이루고 반복운동으로 서로의 자리를 계속해서 교차한다. 윤상윤의 양손회화는 변증법의 합(synthesis)을 지향할 것인가. 그 나선의 계단을 오르게 될 것인가. 그의 회화가 이 본질적인 물음에서 어떤 답을 찾아낼지, 그의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
과거는 미래에 완성된다.
윤상윤의 왼손 드로잉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으면, 작가 자신에게조차도 망각하고 있던 순간들, 소중했던 기분들, 억눌러 왔던 욕망, 몸이 기억하고 있던 감각들을 찾아가는 여정에 동참할 수 있다. 우연한 이미지에서 시작된 선이 무작위적으로 또 다른 선으로 이어지면서, 또 다른 기억이 함께 부상하고 가라앉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리고 마침내 귀환한 그의 ‘알 수 없는 그 무엇’의 편린들이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 이야기 속에서 관객들은 자신에게도 도래할 귀환의 순간을 상상한다. 그것은 그의 과거, 당신의 과거, 그리고 우리의 과거가 완성되는 시점이다. 그때가 바로 이 그림을 보고 있는 당신의 ‘지금’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과거는 완성된다. <끝> ■ 박겸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