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실하 초대전: 한글, 우주를 품다!

우실하

한글, 우주를 품다 ● 한 마리 새가 날아오른다. 고대부터 간직한 울음을 내뱉으며. 세계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은 몸짓으로 날개를 편다. 지상에서 하늘로 곧게 오른다. 하늘과 땅으로 이어지는 우주의 원리는 이를 잇는 한 마리 새의 몸에 새겨진다. 새는 무한히 이어지는 우주를 보고 동시에 저 아래 펼쳐지는 지상을 본다. 태고부터 이어진 그 역사는 우주의 역사에 살포시 안긴다. 그렇게 세계는 한 마리 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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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역사의 흔적을 탐구하는 한 학자가 있다. 오랜 시간 연구에 몰두하며 오래된 문헌과 현장을 누빈다. 이제 그의 흔적들이 화이트 큐브에 전시된다. 대상이 화이트 큐브로 들어온다는 것은 어떤 조건을 만족시켰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형식을 입었다는 뜻이다. 조형적 형식이든 작가의 의도적 형식이든 말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형식과 내용의 관계맺음이다. 의미가 형식을 억압할 때 촌스럽고 조악하다. 형식이 의미를 배제할 때 번드르르하고 허무하다. 학자 우실하의 작업들은 긴 시간 둘 사이의 경계선을 탐색해온 결과이다. 학자로서 한 길을 파고드는 우직한 작업이 어느 지점에서 작가의 조형 작품으로 전환되는 것인가. 하늘로 날아오른 새는 이번에는 의미와 형식의 두 간극을 훌쩍 메워 이을 수 있을까. ● 커다란 한지를 가득 메운 한글의 스물여덟 자모는 그 자체로 강렬한 형상이다. 겹치고 배치(排置)되고 비치고 반전되는 이미지. 끊임없는 움직임이 화면 가득하다. 그것은 정적인 자리함이 아니라 동적인 움직임이자 출렁임이다. 글자인 동시에 글자가 아닌 자음과 모음은 중첩된 형상으로 화면 전체에 당당하게 자리한다. 그 뒤로 '세종어제훈민정음' 서문이 은은하게 드러난다. 이 또한 읽을 수는 없다. 한지의 앞뒤로 여러 번 우유와 먹으로 농담을 달리해 쓴 것이다. 굵게 소리를 내지르는 자음과 모음의 곁에서 작게 소곤거리는 형상이다.

전체가 진하고 연한 먹의 농담으로 여러 겹의 레이어를 드러내고 있다면 빨강, 파랑, 노랑, 하양, 검정의 오방색은 「한글 만다라」의 중심을 차지한다. 음양오행의 원리에 따른 오방색의 하도*(*주역 팔괘의 근원이 되는 그림으로 복희씨 때 황하 용마의 등에서 발견되었다고 전해진다.)는 한글의 제자원리를 품고 있다. 중앙에 작게 배치된 것에서부터 시원하게 화면을 가르고 중심을 전체로 확대한 것까지 다양하게 변주된다. 중심에 작게 하도를 그리기 시작했던 학자는 커다란 한지를 앞에 두고 작가로 거듭 태어난다. 압도적 크기는 새로운 감각을 일깨운다. 하도 이미지는 조형적으로 더욱 단순해지고 동시에 강한 힘을 얻는다. 우리의 가장 소중한 문화유산인 한글은 이제 의미와 조형성 모두에서 우리를 압도한다. ● 작가는 조형의 탐구와 함께 재료의 실험도 진행한다. 우유로 코팅이 된 한지는 순식간에 그 성질을 바꾼다. 스며들고 빨아들이는 한지에서 우유가 묻은 부분은 이제 더 이상 물을, 먹을 담아내지 않는다. 먹의 농담은 비켜나서 쌓이고 얇은 한지에 깊은 층위를 이끌어낸다. 이를 찾아가는 과정은 지난함이 있었겠지만 결국 작가는 자신이 드러내고 싶은 형상을 다른 재료를 통해 주저함 없이 이끌어낸다. ● 어느 것 하나 의미와 형식이 서로 밀림이 없다. 의미와 형식의 긴장은 작가의 의도에서 생기는 것만은 아니다. 각자의 힘과 템포가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로 전환되고 자연스럽게 긴장감이 드러난다. 의미가 형식을 압도할라 형식이 의미를 밀어낼라. 그 사이 균형을 찾아내기 위해 작가는 얼마나 수도 없이 보오얀 한지를 앞에 두고 고민해왔는가. 이렇게 찾아진 최적의 긴장감은 대립을 떨치고 조화로 이어진다. 의미를 형상에 담는다는 것은 이처럼 학자의 구도이며 작가의 끝없는 파헤침일 것이다.

의미와 형식의 균형 잡기는 작가의 다른 연작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매년 새해가 시작될 때 작업한 열세 점의 「신년화」는 2021년 다시 돌아온 소의 해로 한 바퀴를 꼬박 돌아 제자리로 온다. 신년화 작업은 부적의 형식과 작가 자신이 구성한 다양한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신년화」에는 작가의 연구 분야에서 축적된 것들이 빼곡히 자리한다. 형상은 역사적 유물과 기록에서 차용했다. 요하문명에서 돼지 형상의 옥저룡의 이미지를, 십이지신도에서 개의 형상을, 청동기에서 닭의 모습을 빌려 그대로 사용하거나 변형한다. 도상에서부터 문자, 부적의 문양 시대에 따라 형태와 의미 변화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한자까지 화면에 가득하다. 그럼에도 내용에 치우치지 않는다. 이를 절제된 형식에 담고자 했다. 고대 문자는 그 자체로 이미지이며 추상형상이 된다. 풍부한 내용과 형식 사이에 변칙적, 해학적 요소가 있다. 귀여운 쥐가 화면의 옹기종기 모여 있고 호랑이 '호(虎)'자의 금문의 마지막 획은 호랑이 꼬리를 닮았다. 조형적 의의로도 학문적 의미로도 균형을 잃지 않는다. 재미, 형식적 요소, 역사적 내용, 염원이 응축된 화면으로 구성되면서 조형적인 쾌감을 준다. 현대에 익숙하지 않은 형상이 낡고 오래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젊은 친구들의 눈에 다시 신선하게 느껴질 수 있는 작가의 작업들은 단순히 옛 것을 향한 학자의 노력만으로 남지 않을 것이다. 「신년화」는 해마다 당시의 상황과 마음을 담았다는 점에서 시간의 흔적이 새겨 있다. 이번 신년화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이겨내고 새롭게 한 해를 보내기를 염원하는 작가의 마음을 담았다.

이제 가장 중요한 의문이 다시 떠오른다. 왜 꼭 조형 작업이어야 하는가. 작가는 왜 그 오랜 연구를 하나의 총체적 이미지로써의 작품으로 전환했는가. 내부에서 끊임없이 추동하는 어느 욕구가 학자를 작가로 내몰았던 걸까. 어느 때보다 한글이 '힙'한 지금, 일련의 작업들에서 작가는 한글의 제자원리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화면 가득 고스란히 품고 조용하게 드러낸다. 지금까지 연구해왔던 내용 −명리학의 내용, 음양오행의 원리, 역사적인 문양과 도상, 중국 문명과 한국 문명의 발자취, 한글의 원리− 을 제한된 형식 안에 총체적으로 이끌어오는 데 성공한 이번 작품들은 그래서 중심과 무한한 변용을 동시에 품고 있는 만다라와 닿아 있다. ● 다시 우리는 작가 우실하의 작품에서 무엇을 찾아야 하는가. 모든 것은 방대한 역사와 기록들에서 출발해 일련의 네모난 화면 속 형태들로 돌아온다. 역사적 의미는 미적 형식으로 전환된다. 미적 형식은 다시 의미 속으로 날아오른다. 물론 미적 형식이란 단순히 아름다운 형식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모든 예술 활동을 아우를 수 있는 포괄적인 범위의 형식이다. 결국 작가의 작업에서 미적 형식을 읽어내고 이를 통해 그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학자의 조형 작업은 이제 거꾸로 작가의 의미 연구로 다시 읽어도 되지 않을까. 학자는 작가로 거듭나고 새는 다시 우주에서 지상으로 내려와 조용히 날개를 접는다. ■ 김태은

'한글 만다라' 작품이나 '신년화' 작품은 필자가 나름대로 개발한 우유를 이용해 여러 겹의 레이어를 두는 기법, 붓글씨를 이용해 탁본 기법처럼 글을 도드라지게 하는 기법 등을 사용한 작품들이다. 나는 동북아시아 고대 사상사와 문화사를 전공하면서 동북아시아의 고대 역사-고고, 문화, 종교, 사상 등에 대해서 연구한다. 나에게 음양오행론, 한글의 제자 원리와 하도(河圖), 붓글씨, 갑골문, 금문, 탁본 등등은 매우 익숙한 분야이다. 이러한 분야에 대한 내 나름의 지식을 조합하여 다양한 형태의 작품들을 그려왔다. (...) 그동안 나름대로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려왔지만, 환갑이 되어서 정식으로 여는 첫 개인전에 선보는 이번 작품이 전문가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여질 지 걱정도 되고 궁금하기도 하다. (작가 노트 중) ■ 우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