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몽원羽化夢園

박준혜

삶-공간을 날다 ● 꽃 꽃 한 송이 바라보다. 눈을 떠난 시선이 지구 한 바퀴를 돌아 보드라운 꽃잎 위에 내려앉았다. 어디 한 바퀴만 돌았을까, 긴 시간 피고 지길 반복해 온 생의 횟수만큼 – 시선은 투명하고 끈적하게 유영하는 빛의 등을 타고 돌아 꽃잎의 섬세한 피막을 붉게 터뜨린다. 한 사물을 보는 일에 수반된 눈目의 역사. 운동하는 시선은 사물의 감각적 표피를 뚫고 들어가 태초에 탄생한 시간만큼 길게 살아낸 그의 삶의 이력을 한발 한발 따라 걷는다. 긴 인내의 끝은 생을 향한 치열한 분투. 피어나느라 애썼지? 쓰리도록 아프게 살아있구나, 그렇게 만개하는 순간. 텅 빈 침묵 속에서 꽃 한 송이가 붉게 물들인 머리를 천진하게 갸웃거린다. 꽃은 그것 말고 달리 분주한 일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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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분주함 ● 박준혜 작가의 개인전 『우화몽원』은 꽃과 함께 하는 작가의 내면 운동을 형상화한 전시이다. 자연 사물 앞에서 작가가 수행하는 감각 활동은 인간과 사물의 독특한 공존 방법을 제시한다. 일반적으로 한 사물을 바라본다는 것은 시각 주체가 그 사물을 특수한 대상, 즉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눈앞에 서 있는 객체로 대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주체와 객체의 분리 운동은 사물을 개념 규정하여 추상적 차원으로 재생하고 그것을 자신의 소유물로 삼는 일에 효과적이다. 이는 우리 인류가 자연에 대해 행해 온 지식의 역사와도 유사하다. 자연 사물의 원질arche을 발견하기 위한 인류의 성실한 노력은 어원상 '아르케'가 소유 내지 점유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은밀하게 감추고 있다. 지식의 운동 방식은 그런 면에서 폐쇄적이고 다소 폭력적이다. ● 이와 달리 자연을 '향한' – 여기서 일부러 '대한' 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 - 박준혜 작가의 접근 방식은 보다 개방적인 정동 운동에 가깝다. 작가는 사물의 이름을 '정하기' 보다는 그의 모습을 '본다'. 그의 보는 행위는 사물 존재의 중층적 차원들을 한 겹씩 열어 가는 과정과도 유사하다. 그에게서는 겉으로 드러난 질료적 단계의 모습만이 아니라 자연 사물이 근원적 층위로부터 한 발씩 걸어 나온 사물의 전 생애를 살피려는 운동이 발견된다. 대상을 개념 규정하고 점유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물의 삶 전체를 살피려는 그의 시선에는 필연적으로 '살아있고-살아가고-또 살아내야만 하는' 지상 존재들과의 깊은 연대감이 작동하고 있다.

거울 – 꿈 ● 거울은 작가의 개방적 시각 활동, 즉 개별 존재의 삶과 그 가치를 조망하는 운동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매체이다. 거울은 외부 세계를 자신의 평면에 반사함으로써 또 하나의 공간을 생성시킨다. 거울 공간은 거울 바깥의 빛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지만 그 특유의 반영 운동으로 인해 자신 안에서부터 빛을 뿜어낸다. 작가가 시선을 보내지 않았으면 보이지 않았을 자연 사물이 그의 망막 위에서 반짝인다. '반짝임'. 한 사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 말 외에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반짝임은 한 존재와 또 다른 한 존재가 가장 가깝게 – 무한히 얇은 미분적 공간 속에서 – 마주치는 순간 일어나는 현상이다. 한 사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것이 '언제나 이미' 다른 존재와 함께 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당신의 눈으로 나를 비춰줘요. 당신의 망막 위에서 우리는 손을 잡고 놀고 있네요. 당신의 모습도 그렇게 내 눈에 비추겠지요. 내 눈 속에서 당신을 바라봐요.' ● 실재 공간과 거울 공간의 양립은 현실과 꿈의 관계를 상기시킨다. 일반적으로 꿈은 현실의 반영으로 일컬어지지만, 작가의 거울 작품들에서 이들의 관계가 역전될 가능성이 발견된다. 즉 꿈의 반영으로서 현실. 꿈에 현실이 밝게 드러난다면, 현실에 드러난 꿈은 어둡고 신비한 잔영을 남긴다. 거울 표면에 작가가 심어 넣은 표범과 부엉이와 꽃잎과 풀과 도마뱀과 해와 구름은 작가의 내적 연합 운동을 통해 한 자리에 모인 사물들이다. 거울 표면, 안과 밖, 현실과 꿈의 중간 어디쯤 작가는 자연에서 만난 사물들을 걸어 두었다. 거울 밖의 빛에 닿으면 사물들은 거울 안에서 생생한 듯 빛을 발하지만, 거울 안의 빛은 거울 바깥에 사물의 그림자를 남긴다. 빛이 없다면 우리는 사물들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동시에 그림자가 없다면 사물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그렇게 실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에는 삶-공간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날개가 돋다 ● 작가가 열어둔 삶-공간 앞을 서성대며 걸어 본다. 나는 공간 '앞'을 걷는다고 생각했지만 눈을 들어보니 나는 이미 그 '속'을 배회하고 있다. 삶-공간 속에서 꽃과 풀과 표범과 구름과 해와 부엉이와 도마뱀이 살아온 이야기가 들려 온다. 더 자세히 듣기 위해 사물 가까이 몸을 움직여 본다. 얼굴에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아, 있구나!' 거울 앞 존재에 눈뜨기 시작한 영혼이 망막을 뚫고 들어가 운동하기 시작한다. 근육이 움찔거리더니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몸에 땀이 촉촉하게 새어 나온다. 무언가 내 안에서 꿈틀거린다. 등이 가렵다. "아름다움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되면 열이 나고 그 빛에 의해 날개의 타고난 힘이 솟아나기 때문일세. 과거에 딱딱하게 막혀 있던 구멍들이 열에 녹아내려 영양분이 흘러 들어가면 뿌리에서부터 부풀어 오른 날개의 깃이 마침내 영혼 전체로 내리뻗기 시작하지. 이는 지난 날 영혼에 날개가 달려 있던 까닭일세." (플라톤, 『파이드러스』, 251a-b) ■ 임지연

꽃은 인생이다. 꽃은 어려운 여건을 이겨내고 강인한 생명력을 잃지 않은 결과물이다. 우리의 인생 역시 어려운 상황을 견뎌내고 새로운 희망의 세계가 올 것이라는 의지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 박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