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권 개인전: silver & white landscape

이상권

풍경, 시간의 무게와 깊이 ● 시대마다 회화의 형태와 의미는 바뀐다. 사람의 마음, 가치가 바뀌어도 그렇다. 같은 언어, 같은 매체를 사용하지만 각자가 속한 시간대에 묶여있어 서로 다른 의미의 세계를 경험한다. '풍경'1)이 그렇다. 오늘날 회화 이미지로서 풍경의 의미는 과거 강단 미술사의 관점과 해석에서 벗어나 현상학적 존재의 차원에서 바라보는 이미지, 관점, 태도, 다양한 실천 등을 내면화하는 것이다. 시간에 묶인 채 작가와 작품과 관객이 수많은 경로를 따라서 분절하는 관계 사이에서 가치와 의미의 자리가 만들어진다.

READ MORE

1. 이상권 작가에게 이번 전시는 풍경이 깊은 고유의 의미와 심미적 내용을 담을 수 있느냐하는 화두를 전면에 걸고 준비하였다. 지난 4년간 경기도 파주로 이주한 후 작가는 지난 시기 그의 회화의 중심을 이루었던 도시와 일상, 인물들을 화면에서 배제하고 파주의 자연과 풍광을 담담하지만 섬세한 관찰과 표현으로 화폭에 담았다. 도시와 인물이 사라진 나무와 돌과 숲과 그 사이사이 길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대상의 크기와 상관없이 이미지 하나하나가 매우 끈기있게 표현되어 있으며 화면은 중심과 주변의 구분 없이 균일하게 우리의 시선을 끌어들인다. 그러나 그의 작가로서의 태도와 작업방식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관찰과 재현, 성찰과 모색에 일관된 모습을 보여준다. ● 오랫동안 작가는 반복적으로 거대한 나무 시리즈를 통해 자신의 흔들리는 마음과 그림의 한가운데 큰 나무를 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길은 지평선을 따라서 아주 멀리 늘어지며 이리저리 방향을 뒤튼다. 작가의 풍경 속 길과 나무는 서로 닮았다. 반복된 일상 가운데 기억된 풍경과 지금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이 겹치며 변주한다. 시간들과 경험, 기억들이 현재의 감각과 융합한다. 이상권 작가의 풍경은 수많은 시간이 복잡하게 흐르고 머물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풍경은 시간의 초상화 또는 역사화처럼 이해된다. ● 작가의 풍경은 일반적인 원근의 표현 방식을 따라서 가까이 있는 사물은 크게 그리고 멀리 있는 사물은 작게 그렸으나 찬찬히 살펴보면 가까운 사물이나 먼 사물이 매우 균질한 붓터치와 채색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사물의 크기를 제외하고는 사물 간의 멀고 가까운 거리의 차이가 없다. 앞이나 뒤나 중심이나 주변도 차별이 없다. 대상들은 마치 빛을 정면에서 받은 것처럼 그림자가 축소되어 얇게 처리되어 있다. 다양한 크기의 색면으로 채워진 이미지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동시다발적으로 내세운다. 이렇게 전면화된 이미지들이 펼쳐지고 접히고 다시 펼치기를 반복한다. 가까이 그리고 멀리, 중심에서 주변으로 그리고 주변에서 다시 중심으로. 이리저리 시선이 움직이며 화면 곳곳 사계절의 자연의 풍경이 있다. 수많은 길들이 펼쳐지고 길과 길 사이에는 나무와 돌이 빽빽이 자리하고 있다. 길은 풍상에 비틀린 소나무처럼 이리 틀고 저리 틀며 연결되어 있다. 나무와 돌은 그 사이사이를 빈틈없이 채워진다. 하나의 화면에 수십 또는 수백의 시점이 혼재되고 교차하고 있다. 작가의 눈은 매번 위치를 바꾸고 다른 형상을 재현한다. ● 작가는 대상들의 익숙한 모습을 해체하고 다수의 색면과 붓질, 복잡한 결의 방향들로 재구성한다. 이리저리 빛과 색의 크기와 방향이 쉼없이 바뀌는 복잡성이 이상권 작가의 풍경의 조형적 특징으로 보인다. 다른 각도와 시점이 혼재되어 재현된 이미지와 마주하는 관객은 처음에는 그림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흔들린다. 이러한 흔들림 속에서 그렇게 해서 숲과 길과 암석이 뒤섞이어 평면적인 풍경으로 나타난다.

예술은 대개 깊이를 욕망한다. 깊이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 즉 내면의 풍경으로 사유되고 표현된다, 풍경의 깊이는 세로로 세워진 뒤의 것이 앞으로 당겨진 느낌이다. 일반적인 풍경의 의미가 아니라 작가 개인의 개별적인 경험에 근거해 재정리한 특별한 인상과 의미를 향한 풍경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깊이'2)라는 화두를 잡고 집요하게 사유하는 작가의 모습은 그의 풍경에서도 느낄 수 있다. '깊이'란 정지된 상태가 아니다. 깊이는 하강하는 운동을 은유한다. 하강과 상승의 관계 속에 깊이와 높이가 사유된다. 예술가들이 깊이를 사유하는 방식은 사실은 어떤 조형적 이미지와 표현이 아니라 하나의 이미지에 정착하여 완벽하게 결합되고 재현될 수 없는 쉼 없는 운동상태를 의미한다. 깊이와 크기가 결합하면 '숭고崇高'의 감정을 일으킨다. 운동이 또 다른 운동을 촉발하고 견인한다. 심미적 깊이는 무엇으로 측정해 인지할 수 있는가? ● 자연계의 모든 것은 각자 고유의 시간과 속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각자의 자리가 있다. 통상 '역사'라고 부르는 것은 시간이 단순히 나뉘고 합쳐지는 것이 아니라 삶을 구성하는 무수한 요인들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해석되고 재현된 시간성을 의미한다. 이상권 작가의 이미지에는 이러한 시간이 조직(組織)되어 있다. 이는 마치 크고 작은 복수의 시간 속에 분절된 세계의 이미지가 모자이크 또는 몽타주를 통해 재구성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풍경은 운동의 상태가 복잡하게 작동하고 있는 이미지들의 집합이다. 그것은 마치 불교의 탱화 속 세계와 닮은 모습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마치 만다라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2. 세계 인식과 자각. 나는 누구이고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존재에 관한 사유를 끊임없이 하고 있는 과정이 풍경의 중간에 자기 정체성과 세계의 실재성이 부유한다. 너무나 많은 길과 길 위에 있지만 한 순간과 한 장소에 있는 나는 하나일 뿐이다. 복수가 아닌 단수가 역설적으로 깊이를 담보한다. 깊은 만큼 높이가 더 높이 인식되고 마찬가지로 높은 만큼 깊이가 더 깊은 것이다. 정말 깊다는 것은 높이 없이는 인식할 수 없다. 상대적 관계 속에서 형성된 깊이냐 아니면 절대적 의미의 깊이인가? 인간이 절대적 깊이를 경험할 수 있을까? ● 자연은 결코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다. 자연이 아름답다거나 추하다고 느끼고 인식하는 것은 사람들의 기호에 따른다. 회화도 결코 아름다워야 한다거나 추해야 한다거나 하는 어떤 강령과 이념에 따르는 것은 아니다. 모든 회화는 인간의 눈으로 바라본 어떤 상태일 뿐이다. 회화는 결코 자연 그 자체를 재현할 수 없다. 과하거나 모자란 이미지로 표현하고 대체할 뿐이다. 자연을 닮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도시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사람들의 눈에는 녹색은 나뭇잎이고 빨간색은 꽃이다. 이름 모를 나무와 꽃과 풀들 그리고 돌과 암석들이다. 문명과 인공의 눈으로 보는 자연은 익명으로 존재한다.

이상권 작가의 풍경은 마치 그림 속에 그림이 있고 또 그림 속에 그림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림의 어느 부분을 보더라도 하나의 중심이 형성되고 그림 전체는 방금 막 형성된 중심을 축으로 회전하며 이미지들의 질서와 구조가 만들어진다. 이런 마술적 신비가 첨단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21세기에도 회화가 유의미한 예술로서 살아남은 이유이다. 화가의 쉼없는 드로잉과 채색의 행위가 중첩된 평평한 이미지의 집합 속에서 우리는 생생한 운동과 살아있는 분위기를 느낀다. 생명으로 충만한 세계와 함께 호흡하고 관계 맺으며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놀라운 '경이(驚異)'다. 느낄 수 없다면 더이상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숨 쉬며 움직이지만 좀비와 같다. 신체를 가진 유령이 아니라면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의 생명력을 감응하고 공감하며 기뻐한다. ● 풍경은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가 풍경과 하나가 되고 나 자신이 풍경이 되는 것이다. 꿈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평화로운 풍경은 세속적인 욕망의 투쟁 속에 지친 우리를 위로한다. 미술사 속 수많은 당대의 풍경은 당대의 관객들과 대화하고 공감하며 공존한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의 공통의 기억으로 남게 된다. ● 눈앞의 현상을 설명하기는 쉬워도 그 현상을 만들어 내거나 재현하는 것은 어렵다. 한 작가가 오랜 시간 혼신의 노력으로 붙잡고 있는 화두와 그 과정에 형성해낸 이미지도 이와 다르지 않다. 상투적인 미사어구와 논리로 편집하지 않은 채 작가 고유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특별한 문장을 구성하는 것은 차라리 겉보기에 거칠고 불투명하고 논리의 비약과 논리의 뒤틀림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과장과 과소가 뒤섞인 언어들이 한 작가의 보이지 않는 관점과 태도, 그가 보낸 시간들을 드러내는 마법을 부리기도 한다.

우리는 이상권 작가의 작품에서 짧은 시간에 도시화가 이루어져 도시와 농촌, 전통과 현대가 불규칙하게 섞여 있는 수도권의 전형적인 풍경을 볼 수 있다. 전통의 질서와 문화가 해체되고 거칠게 그리고 폭력적으로 새로운 질서와 문화가 유입된다. 오랜 시간이 지나 과거와 현재가 뒤엉킨 새로운 종의 질서와 문화가 나타나면 우리는 새로운 풍경화의 대상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작가의 풍경은 담담하게 이러한 파주의 변화를 재현하고 있다. 이 과정은 큰 나무가 그 크기와 나이만큼 나이테를 품듯 한 겹 두 겹 시간의 무게와 깊이를 견디는 것이다. ■ 김노암

* 각주 1) 풍경을 뜻하는 영어 'Landscape'로는 우리말 '풍경'의 의미를 온전히 담고 있지 않다. 영어 'Landscape'는 경치, 조망 등의 의미도 담고 있으며 인간이 인위적으로 계산하고 사유하며 변경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자연이다. 인간문명에게 봉사하는 순화된 자연의 얼굴이다. 역사시대 이전 인류가 경험한 강대한 폭군이었던 자연이 아니다. 우리에게 풍경은 전통적으로 산수(山水)의 의미에 걸쳐 있다. 2) 깊을 심(深)자는 물웅덩이에 나무를 넣어 깊이를 잰다는 뜻이다. 이상권 작가의 작품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거대한 나무, 또 숲을 이루는 나무들은 모두 어떤 깊이를 재는 것을 은유한다. 높이 솟은 나무가 더 깊이 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