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은 뒤에 가서 죽는다

김민조, 박필교, 이연정, 함성주

존은 뒤에 가서 죽는다 : '뒤', 의미의 틈새 ● 여기, 네 개의 세계가 존재한다. 서로 겹침이 없는 고유한 색감과 질감들을 지닌 세계들이다. 이 세계를 묶는 유일한 틀은 영화에서 차용한 '존은 뒤에 가서 죽는다'라는 타이틀이다. 세상의 어느 이름으로도 치환이 가능한 '존'과 어느 존재라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죽는다'를 걷어낸다. 남는 것은 오로지 '뒤에 가서'뿐이다. 각각의 세계를 하나의 공간에 묶을 수 있는 유일한 그물망, 그것은 '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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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 보드랍고 여리고 연약하고 수줍은 것들을 위한 안식처이자 대개는 어둡고 거칠고 더럽고 저 아래를 가리키는 곳. 낯 뜨겁고 노골적이고 천박하고 맨얼굴을 드러내는 곳, 그래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곳. 음지이자 진흙투성이 더럽고 어지러운, 그럼에도 고귀한 것을 품어내는 그곳! ● 다양한 세계가 각각의 무게를 가지고 침범 받지 않고 존재하려면 애매한 말이면 좋다. 오해를 불러일으킬 말은 더욱 좋다. 깔끔하게 정의되어 한 줌의 오해도 남지 않도록 명료하다면 세계들은 공존할 수 없다. 항상 결말만 알면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가 궁금해 하는 것은 그 이면이고 이후이며, 쉽게 들여다볼 수 없는 틈새이다. 의미와 의미 사이의 틈새. 표면과 그 이면 사이로 의미는 항상 미끄러진다. 서로를 감아 돌며 의미를 감추는 단어의 양면성, 그 비껴나가는 의미를 잡아채는 것이 여기 네 작가들이다. 아니, 출발은 같았다. 그러나 세계는, 작가들은 각자의 뒤를 발견했다. 그렇다 존은 뒤에 가서 죽는다. 그렇다고 뭐가 달라지는가.

다시 돌아오는 뒤와 같이 / 김민조 ● 김민조가 형상화한 캔버스 속 세계는 언뜻 보면 친숙하다. 누구든 흔히 겪을만한 상황이다. 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려 다가서면 시선을 밀어낸다. 화면 전반을 채우는 푸른빛 때로는 어둠, 대체로 또렷하게 드러나지 않는 인물의 얼굴. 「매미가 울지 않는 날」도 그렇다. 나무에 매달리고 사다리에 올라가 있는 인물들은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기묘한 각도로 잘라낸 구도는 한층 더 불편함을 더한다. 작업방식은 이전과 다르지 않다. 자신의 상황과 환경, 자신을 둘러싼 주변인들에게 받은 영향과 자극을 화면으로 옮기는 것이다. 작가는 사진을 콜라주 하듯 화면에 구성하며 촉감적이고 보다 내재적인 것을 드러내려고 시도했던 이전의 작업에서 한걸음 이동한다. 직접 찍은 사진들을 화면에 옮기며 비현실적으로 느낄만한 요소를 결합한다. 이렇듯 다가가려면 밀쳐내는 듯한 김민조의 작업에는 현실과 가상이 서로를 휘감아 돈다. 둘은 분절되지 않고 끊임없이 다시 돌아오며 한 화면에서 움직인다. 이는 작가가 생각하는 '뒤'의 개념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작가에게 '뒤'는 시간적인 의미로 이해되며 작업을 마치고 뒤로 밀어두었던 작업은 단순히 과거에 남겨진 작업에 머물지 않는다. 시간성은 단선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며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도 아니다. 과거는 현재 속에 끊임없이 드러나며 현재는 언제과거를 소환한다. 겹겹이 감아 도는 이중 나선과 같은 시간 속에서 김민조의 작업은 계속해서 뒤로 돌며 나아간다.

나의 뒷모습은 내가 아니다 / 박필교 ● 박필교의 작품 이미지는 명확하다. 일상의 다양한 세계가 있고 그 안에 벌거벗은 인물이 있다. 작가의 모습은 나체이기에 한 발짝 뒤로 물러나 거리를 두게 된다. 이 둘의 충돌에서 이미지는 의도치 않은, 아니 어쩌면 가장 강력하게 의도한 대로 힘을 발산한다. 블편해서 시선을 돌리고 싶은데 자꾸만 빤히 바라보게 된다. 자신을 발가벗겨 거꾸로 대담하게 세상을 비웃는 듯한 작품 속 작가는 실제의 작가와 괴리가 있다. 당연하다. 작가는 그래서 작품 속의 자신이 '뒤', '뒷면'이 아닐까 생각한다. 앞의 나, 즉 현실의 나와는 도저히 접점이 없어 보이는 벌거벗은 인물은 단순히 모습만 작가를 닮은 다른 개체일수도 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 자신만이 볼 수 없는 작가의 뒷모습은 작품 속에 고스란히 투영되며, 그렇기에 작가의 뒷면이며 다른 나가 아닌, 더욱 작가 그 자신이다. 뒤는 거짓으로 꾸며낼 수 없는 세계이며 그래서 사람들은 그 사람의 뒤를 본모습이라고 하지 않는가. ● 무의식 그 아래 일렁이고 있는 가장 진실한 나. 하지만 이것을 나체의 인물에 일대일로 적용하는 것은 일차원적이다. 작가 그 자신인 인물은 동시에 다시금 작가가 아니다. 작가는 오로지 가상으로 만들어진 세계를 통해서만 드러나기 때문이며 그렇기에 그 어느 때보다 본래의 자신을 그려내고 있다. 「지축의 울림」과 「찰나의 빛줄기」 속 작가의 어슴프레한 뒷모습은 웃음이 날 듯, 눈물이 날 듯 시선을 잡아끌고 감정을 뒤섞어버린다. 그렇게 우리는 작가가 마련한 발칙하지만 서글픈 세계 속으로 발을 딛는다.

어느 곳으로든, 그곳으로 / 이연정 ● 현재는 하나의 상태다. 상태는 그 자체로 닫힌 동시에 가능태를 품고 있는 씨앗이다. 그것이 지금 이연정이 생각하는 '뒤'이다. 어느 곳으로 이어질지 모르는, 장소적 의미가 아니라 시간적 의미로, 그러한 가능성을 품고 작가는 작업들을 이어나간다. 인체 이미지들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이전의 작업에서 물체에 신체적 이미지를 투영하는 최근까지의 작업들에서 작가는 새로운 시도를 계속한다. 그대로 스쳐 지나가서 버려지는 뒤가 될지, 앞으로 계속 작업으로 이어지는 뒤가 될지는 모른다. 뒤는 시간의 뒤이며 그렇기에 앞이며 다가올 미래이다. 시간상으로 '앞으로'라는 뒤, 즉 미래의 작업은 열려 있다. 이연정의 지금의 작업들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고 촘촘히 쌓인 시도들은 작가를, 작품을, 관객을 어느 곳으로든 데려갈 것이다. ● 작가는 작업실 주변을 다니다 발견한, 마구 버려져 널부러져 기능을 잃을 부품 이미지를 캔버스로 가져온다. 이제 남겨진 부분들은 기이하게 떨어져 나온 신체와 치환된다. 「길에서 발견한 신체들에서」 한층 창백하게 가라앉은 색감은 비현실성을 더하고 거리감을 일으킨다. 본체에서 떨어져 나와 완벽하지 않고 부족한 이미지는 그 자체로 인간 신체로 연결된다. 인체에서 떨어져 나온 일부는 그것이 기관이든 머리카락이든 손톱이든 그 자체로 기묘하다. 인간성을 잃고 본래의 자리로부터 탈락된 것이 주는 낯설고 기묘한 감각은 이연정의 작품 속에서 새로운 자리를 마련한다.

뒤돌아 발견되는 세계 / 함성주 ● 시작은 뒤에 쌓이고 탈락된 작업들, 실험적이고 그래서 성공보다는 실패가 더 자연스러운 작업들에서였다. 그것이 함성주가 출발점으로 삼은 '뒤'였다. 작업의 궤적에서 새롭게 발굴하는 것들을 전시하려는 소박한 시작이었다. 의도치 않게 뒤로 빼놓았던 것은 어느새 감춰진 것이 된다. 문득 어느 순간 그 안에서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뒤에 쌓여가는 작품들에서 어째서 하나의 세계가 다시 발견되는가? 그것은 단순히 시간의 선물인가. 성장하고 변화하는 나의 시선의 차이인가. 단순히 이번 전시에 국한되는 질문은 아닐 것이다. ● 눈이 감각하는 방식과 작가의 시선의 문제가 바로 함성주의 작업을 관통하는 지점이다. 이는 구조적으로 이루어진 경험의 영역이면서 동시에 발견해내는 시선의 힘이다. 본다는 것이 작가에게 가지는 의미가 무엇일까. 함성주에게는 액정을 통해 전달받은 시각적 자극이 단순히 평면적인 인지가 아니다. 보다 촉감적이고 입체적인 방식의 접촉이다.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시대는 새로운 감각을 생산한다. 지금의 우리는 더 이상 이전의 방식으로는 세상을 감각할 수가 없다. 그것은 질감도 색감도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를 열었다. 이전에 자연스러웠던 방식은 이제 어색한 것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작가의 감각 방식은 「burden」에서도 드러난다. 매끄러운 표면이 아니라 어딘지 울퉁불퉁한 촉감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화면에서 우리의 눈은, 작가의 눈으로 바라본 질감을 찾아 표면을 더듬는다. 마치 손으로 감각하듯이 말이다. 함성주는 쌓아놓은 뒤에서 계속 발견하고 시선이 성장하는 만큼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을 새롭게 찾아낼 것이다. ● 영화에서 존은 뒤에 가서 죽었던가, 결국 마침내 죽었던가. 혹은 존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게 중요한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우리는 이 제목을 통해 방황하였고 아직 도착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종착지에 도착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각자의 구상을 따라, 고민을 따라서 말이다. 작가들에게도 결국 자신의 길을 찾아 하나의 세계를, 각각의 세계를 더욱 선명하게 새기도록 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 김태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