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강규건이 이번 전시 < 지금, 여기의 날들 Nowhere days >에서 우리에게 내미는 화면은 지금, 여기에만 존재하고 그 어디에도 없는 순간이다. 그의 작업에서 우리는 꼼짝없이 지금만을 보도록 이끌린다. 작가는 영원 속에 멈춰버린 것 같은 이미지를 우리에게 던진다. 사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들의 모습일 뿐이다. 그렇지만 화면 속 세계는 일상 그대로일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현실이 회화로 옮겨질 때 재현의 문제는 늘 표면으로 부상한다. 우리 주변의 삶의 면면들이 회화라는 방식으로 전환될 때, 그 사이를 잇는 연결고리에 대한 고민이 작가 작업 활동의 저변에 깔려있다.
불안 : 응시와 침잠
< 점프 >는 마치 시간이 소거된 채로, 영원에 머문 듯 보인다. 얼굴 대신 두 다리만을 드러낸 인물은 바닥에 단단히 고정된 모습이 아니라 그 자체로 움직이는, 흔들리는 순간으로 포착된다. 공중에 뜬 다리만을 선택함으로써 작가는 중의적인 화면 구성을 시도한다. 이것은 < 가라앉은 얼굴 >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일부분만이 드러나기에 우리는 정확한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인물에게서 가벼움과 동시에 섬뜩함의 정서를 느낀다. 작가의 의도와 결합되어 환기된 이중의 감정은 삶의 불확실성을 체험하게 한다.
얼굴을 가리고 어둠에 묻히고 빛을 등진 인물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은 본질적인 불안이다. 오로지 윤곽만이 드러난다. < 사건으로부터 >와 < 사건의 바깥 >에서 불꽃을 등진 인물은 마치 빛을 피해 달아나는 듯 보인다. 여기에서 시간만 제거되는 것이 아니다. 공간 또한 모호해진다. 서사가 자리할 공간은 축소되고 제한되고 사라진다. 동시에 그곳은 그 어떤 장소가 되고도 남을 만큼 확대된다. 이렇게 장소는 망각되고 가라앉는다. 그림에서 현재는 모호한 채로 남고 인간의 실존적 불안과 맞닿는 지점이 된다.
불안은 미래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할 때 온다. 하지만 인간은 어느 누구도 미래를 자신의 뜻대로 통제하거나 구성할 수 없다. 인간이 제대로 마주할 수 있는 것은 그나마 바로 지금일 뿐이다. 그나마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실제로는 현재조차도 통제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강규건 작가의 회화작업에서, 드러나지 않는 인물들의 모습과 모호하게 흔들리는 화면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 내재된 실존적 불안을 들여다보게 한다. 개개의 인간으로서의 불안, 궁극적으로는 작가적 삶을 선택하면서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작가적 실존으로서의 불안에 대한 응시가 저변에 깔려있다.
작가는 ‘관성’이라는, 정지 또는 등속도 운동 상태를 지속하려는 물리적 법칙을 이 불안한 세계에 던져진 인간을 이해하는 최소한의 장치로 차용한다. 그는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로서 개인의 작은 경험들, 사소한 습관들을 떠올린다. 그런 작은 습관들이 과거에서 미래를 대비하고 자신의 경험을 미래로 연장해 생각하는 방식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동일하게 유지하려는 최소의 방식을 확인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작가는 항구적으로 운동을 유지하고자 하는 ‘관성’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성을 따른다고 해도 우리가 미래를 구성할 수 없고 불안을 누그러뜨릴 수 없음을 작가는 알고 있다. 미래는 결정되지 않은, 언제나 유동적으로 열려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저 자신의 불안을 온몸으로 짊어지고 미래를 맞이할 뿐이다. 이 지점을 강규건 작가는 자신의 회화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서사의 역설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야기를 찾는다. 서사(Narrative)는 인류가 자연을 이해하고 그 사실을 전달하고자 하던 시대에서부터 존재해왔고 이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속에는 세계에 내던져진 인간의, 불안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내포되어 있다. 반면 이미 봐왔듯이 작가는 의도적으로 서사를 배제한다.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 불안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강규건 작가는 사진을 기반으로 유화 작업을 한다. 사진을 통해 고정된 과거의 사건과 시간을 현재로 소급한다. 그러나 과거의 모든 것을 그대로 불러오지 않는다. 작가는 인물과 과거의 순간들에 부착된 전후 관계, 연관된 서사를 제거한다. 이를 위해 화면을 자르거나 일부를 확대하거나 구도를 변화시킨다. 인물은 맥락을 잃은 채 작가의 화면에 오른다. 작가의 선택과 소거를 통해 인물이 가진 시간과 서사들은 철저히 감춘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사건들의 연속은 이제 강규건의 작업에서 하나의 사태, 하나의 장면으로 전환된다.
“그림 표면 위를 탐색하는 시선은, 그림의 구성요소를 하나씩 차례로 파악해 나가는 동안에, 그것들 사이에서 시간 관계를 산출해 낸다. 시선은 이미 보았던 그림의 구성요소로 되돌아갈 수 있으며, 반대로 ‘이전의 것’으로부터 ‘앞으로 다가오는 것’이 생성되기도 한다. … 그림은 사건을 사태로 대체시키고, 사건을 장면으로 남겨놓는다.” - 빌렘 플루서, 『사진 철학을 위하여
그렇다면 서사가 소거된 상태에서 우리는 화면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시간성과 서사성이 제거된 회화는 어떤 의미로 우리 앞에 서는가? 이 작품들에서 색과 구성이라는 형식적인 요소 이상의 어떤 것을 찾지 말아야 할까. 작가는 우리가 텅 빈 그 자체를 응시하며 실존의 불안에 잠겨들기를 의도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작가는 결국 내러티브의 가능성을 기대한다. 작가 강규건의 회화 작업은 서사를 지운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서사를 불러일으키는 매개가 된다. 새로운 서사를 불러일으키는 장치가 되는 것이다. 완성되지 않은 채로 흔들리고 모호하게 열린 그곳에 관객들은 자신의 내러티브를 채운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비워둔 그 자리는 역설적으로, 다시금 의미로 이루어진 사건이 되는 것이다. 비워두었지만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이중의 작업방식이 작가의 고민에 대한 역설적인 답을 제시한다.
주제와 형식의 이중나선
강규건 작가의 작업에서 인물은 빛 속에 또는 어둠 속에 잠겨 있다. 여기에서 작가는 효과적으로 주제와 형식을 반복하며 일치시킨다. 빛과 어둠은 작가의 작품 전체를 지배한다. 인물들은 작가 자신이거나 혹은 작가의 주변인일 수 있지만 이렇듯 빛과 어둠에 묻혀 모든 맥락이 제거된 화면에서는 어느 누구도 아니게 된다. 작가 스스로가 말한 “이미 발생한 어느 사건과, 정답을 알 수 없는 미래를 사이에 둔” 인물은 그 속에서 불안을 느끼며 진동한다. 빛은 불안을 야기하고 위협이 되는 대상이다. 밤의 어둠은 현실의 적나라함을 덮어주고 잠시의 휴식을 준다. 불꽃은 그 두 사이의 어딘가에서 튀어오른다. 하나의 화면 위에는 늘 빛과 어둠이 존재하고 둘 사이의 강렬한 대비 사이에 인물은 흔들리고 모호함으로 떠밀리는 것이다.
빛과 어둠, 불꽃은 그림의 소재이자 대상, 동시에 장치가 된다. 소재적 매력이 곧바로 주제적 형식으로 이어진다. < 불꽃, 다섯 개의 화면 시리즈 연작 > >에서 작가는 모호함이라는 표현형식 안에서 불안이라는 주제를 결합한다. 빛과 어둠의 대비 속에, 마치 렌즈로 클로즈업한 듯 확대되어 하얗게 번지는 불꽃의 발산시킴으로써 이러한 시도는 중첩적으로 진행된다. 주제적 내용이 형식적 표현이 되고 다시금 형식적 표현이 주제적 내용을 지시한다. 마치 회전하는 이중 나선처럼 말이다. 어둠에 묻혀 모호하게 드러나는 화면은 불안을 드러내고 불안은 다시금 작가가 소재만을 남긴 채 나머지 것들을 소거하도록 한다. 이 구성적 방식은 다시금 돌아와 모호함으로 귀결된다. 이 연작에서 불꽃놀이처럼 밝고 아름다우면서 찰나에 사라지는 것은 없다. 정지되어 있지 않고 빠르게 움직이며 흔들린다. 인간의 포기할 수 없는 마음 사이에 근원적 불안이 존재하고 멜랑콜리가 그 사이를 메운다.
그렇기에 작가는 시선을 현재에 잡아놓는다. 작품 속, 작가와 비슷한 나이의 젊은 인물들이 담배를 피우고 불꽃놀이를 하고 누군가를 기다린다. 이 안에 서사는 없다. 정확히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불확실한 것을 온몸으로 껴안고 ‘지금’을 살아가는 모습들, 그저 보이는 대로의 인물의 모습이 전부인 것처럼. 그러나 거기에 멈추지 않는다. 강규건의 회화는 곧바로 미래를 의식하게 만든다. ‘지금, 여기’에 집중하도록 하면서 그 자체로 불확실성의 미래를 화면에 담기 때문이다. 현존재의 불안은 도래하지 않은 것에서 존재하기에 결코 해소될 수가 없다. 불안은 늘 곁에 있다. 사실 우리가 지각하는 그 순간은 곧바로 과거로 밀쳐지며 미래를 이끌어온다. 현재를 보는 순간 우리는 자동적으로 미래를 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새로운 서사가 자리를 채우게 된다. 작가 강규건은 기꺼이 자신의 회화에서 그 자리를 내어주고 멜랑콜리하게 바깥을 떠돈다. ■ 김태은(아트노이드178 디렉터)